[수미산정] 그릇을 씻어라
[수미산정] 그릇을 씻어라
  • 황건 논설위원 ·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20.01.1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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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승이라면 마당 쓸고 죽 얻어먹기 바란다.
객승이라면 아침 예불이라도 반드시 참예하기를
남의 집 자식이면 밥 투정 말고 맛있게 먹기를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면 이불이라도 개기를
이게 일상성의 진리다”라고 설해주신 오현스님
황건
황건

오늘 50cm 길이의 휴지 집게 두 개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하나는 외래치료실에 다른 하나는 수술실에 주려고 산 것인데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나서이다.

교통사고로 타박상을 입은 63세 여자 환자가 이마에 어린애 주먹 만한 혹이 생겨 병원에 왔다. 차에 치여서 머리를 아스팔트 바닥에 찧었다는데, 다행히 뇌의 출혈은 없었지만, 이마의 피부아래에 피가 고인 상태였다. 환자를 치료용 침대에 눕힌 다음, 그 부위를 소독하고는 작은 구멍포로 덮었다. 마취 없이 18번 주사바늘로 혈종(hematoma)를 제거하기 위해 이마 부분을 찔렀다.

환자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다 됐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달래가며 엄지와 집게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어가며 피부를 압박하자 고인 피를 마침내 다 뺄 수 있었다. 한 순간 피떡이 팍 튀어 환자의 얼굴을 덮은 포 밖의 침대에, 또 내 가운에 그리고 치료실 바닥에까지 튀었다. 실리콘 배액관을 박아 넣고 거즈로 상처부위를 덮고 반창고를 붙여 시술은 곧 끝냈지만 피떡뿐 아니라 피를 닦은 거즈들까지 어지럽게 치료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다음 환자를 보러 진료실로 가는 중에 돌아보니 간호사들이 일회용 장갑을 끼고 쭈그리고 앉아서 피 묻은 거즈들을 집어 의료 폐기함에 넣고 있었다. 휴지 집게라도 있으면, 치료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 거즈들을 주우러 쭈그리지는 않아도 될 터였다. 

내가 집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얼마 전 무문관(불교시대사 2007) 제 7칙 조주세발(趙州洗鉢)의 해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조주화상에게 한 수행자가 찾아와 말했다. “제가 처음 총림에 왔습니다. 잘 지도해 주십시요.” 화상이 “아침에 죽 먹는 일을 끝내지 않았는가?”

수행자가 대답하기를 “죽은 이미 먹었습니다.” 화상이 말했다. “그러면 그릇을 씻으시게.”

이 말에 그 수행자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 화두에 대하여 역해(譯解)하신 오현스님은 해설 말미에서 “그대가 수행승이라면 마당을 쓸고 죽을 얻어먹기를 바란다. 객승으로 갔다면 아침 예불이라도 반드시 참예하기를 바란다. 그대가 남의 집 자식이라면 설거지는 그만두고 차려준 밥이나 투정하지 말고 맛있게 먹어주기를 바란다. 그대가 결혼을 해서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면 잠자리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 이불이라도 개기를 바란다. 이게 일상성의 진리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해설은 장남으로 자라서 부엌 일에는 손도 까딱 하지 않던 나의 생활 태도에 얼마간 영향을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밥을 먹을 때 음식을 남기는 경우가 거의 없게 되었으며, 식사 후에는 식기의 잔반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고, 식기를 싱크대에 넣고 물을 틀어 마르지 않게 조처해 놓는다.

세제를 묻혀 씻는 것은 아내나 어머니가 주로 하지만, 누군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밥상에 남은 반찬 뚜껑을 덮어 냉장고에 넣고 밥상을 행주로 닦는 일을 기꺼이 도맡는다. 그럴 때마다 오현스님의 가르침을 잘 수행한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제부터는 일터에서도 이 일상성의 진리를 적용하기로 했다. 즉 피 묻은 거즈를 줍고 바닥을 닦는 일처럼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 본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도와야 하겠단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오늘처럼 미세먼지가 자욱한 날엔 공기를 씻는 거즈는 없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불교신문3551호/2020년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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