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나란타’ 꿈이 서린 ‘선종가람’ 발원지

지공 나옹 무학 三和尙
스승 제자 부도 한 곳에

선원청규 따라 총림 개설
선종 가람 구현 최초 사찰
찬란했던 회암사 모습 남아

대한불교조계종의 전통 수행법 간화선과 선종 가람 배치, 선원청규에 의한 수행전통은 고려 말 나옹화상이 발원자다. 오래전 선이 이 땅에 들어오고 뒤이어 간화선이 도입됐지만 간화선을 수행의 기본으로 삼고 선 전통에 따라 가람을 배치하고 스님들이 생활하는 선의 일체화 전면화는 고려 말 나옹의 회암사가 그 시작이다.

양주 회암사와 지공 나옹 무학 삼화상 부도전. 회암사는 불타고 19세기 말 지금 자리에 새로 부도를 모셨다.
양주 회암사와 지공 나옹 무학 삼화상 부도전. 회암사는 불타고 19세기 말 지금 자리에 새로 부도를 모셨다.

지난해 12월 중순에 찾은 회암사는 한적했다. 서울에서 가는 동안 너른 들은 아파트로 바뀌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면에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장엄한 산이 가로막았다. 회암사를 품은 천보산이다. 그 아래 펼쳐진 넓은 사찰 터가 회암사의 옛 영화를 보여주었다. 사지 입구에는 각종 깃발과 관광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지금의 회암사는 회암사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천보산 계곡으로 이어진 아스팔트 길을 한 참 지나 있다. 제25교구 봉선사 말사다. 

지금의 회암사는 그리 크지 않다. 회암사 옆 천보산으로 난 능선 길에 지공 나옹 무학 세 명의 스승과 제자 부도가 조성돼 있다. 위에서부터 지공화상 부도, 나옹혜근화상 부도, 무학 자초대사 부도와 비가 서 있다. 천보산 꼭대기에서 흘러내린 능선을 따라 서 있는 부도는 수백년 세월을 넘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준다. 연경에서 만났던 이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

여말선초 3화상을 만나다

세 명의 스승과 제자를 연결한 인물은 고려 공민왕이다. 원 황실의 부마이지만 원나라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던 공민왕은 간화선에서 그 길을 보았다. 간화선은 원나라 말기 중국 남쪽에서 성행했다. 몽골 영향을 받는 북쪽과 달리 남은 선종 그 중에서도 간화선이 융성했다.

그 중심이 휴휴암의 몽산덕이와 인도에서 온 승려 지공이었다. 고려의 많은 선승이 간화선을 배우거나 법을 인가받기 위해 혹은 공부를 증명하려 남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설산천희, 태고보우, 나옹혜근, 백운경한, 무학자초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리고 이들 간화선 유학승들은 공민왕대에 모두 왕사 국사를 맡아 불교를 일신했다. 공민왕 이전까지 왕사 국사는 모두 수선사 계열 승려들이었다. 왕족 등 유력가문 출신의 수선사 계열 고승과 달리 중국 남쪽에서 새로운 사조 간화선을 배운 간화선자들은 배경도 권력도 없는 신진 인물이었다. 
 

회암사 전경.
회암사 전경.

원나라의 오랜 간섭과 훈구파들의 득세로 활력을 잃은 고려를 다시 일으키는 ‘르네상스’를 꿈꾼 공민왕에게 원나라 주류도, 고려 주류도 아닌 간화선승은 둘도 없는 동반자였다. 새로운 고려를 꿈꾸는 공민왕에게 확신을 심어준 인물은 인도에서 온 지공화상이었다. 

지공화상은 인도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여덟 살에 나란타사(那爛陀寺) 율현을 스승으로 계를 받았다. 세계적 불교대학 나란타는 당시 이슬람의 침입으로 폐교가 되고 지공화상은 이 대학의 마지막 졸업생이었다. 지공은 19세 이후 인도 전역 순례를 마치고 중국 원나라에서 교화했다.

원나라 천자를 만나 불법을 펴고 총애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고승이었다. 그는 1326년(충숙왕 13) 3월 고려에 들어와 1328년 9월까지 2년 반 동안 금강산 법기암, 개경 감로사와 숭수사, 인천 건동선사, 양산 통도사 등 전국 사찰을 방문해 법회를 열고 법을 펼쳤다. 

3년이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지만 국왕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지공을 추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국순회법회를 마치던 그 해 지공은 회암사를 방문한다. 지공화상의 눈에 회암사 주변 지형은 인도의 나란타와 흡사했다.

지공은 고려에서 자신의 선법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호응할 정도로 선의 토양이 깊고 풍부한데 깊은 감명과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연경으로 돌아 온 뒤 지공은 고려인이 지은 사찰 법원사(法源寺)에서 머물며 고려에서 건너오는 유학승들을 맞았다. 
 

지공선사 부도.
지공선사 부도.

그 중 첫 인물이 나옹이다. 나옹혜근(1320~1376)은 지공과 인연이 지중하다. 지공화상이 고려에서 법을 펼칠 때 8살이던 나옹은 지공으로부터 보살계첩을 받았다.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생사문제에 대한 의문이 일어 출가해 회암사에서 가행정진한 끝에 24세의 나이로 견성했다.

나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큰 스승을 찾아 깨달음의 경지를 확인할 겸 28세 되던 해 회암사를 떠나 1348년 법원사에 주석하던 지공화상을 만났다. 8세 때 받았던 보살계첩을 보여주고 나옹이라는 법호와 몇 가지 신표를 받았다. 

법원사에 주석하던 지공은 나옹을 대면하자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나옹은 “고려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배로 왔는가, 육지로 왔는가”라고 묻자 나옹은 “신통으로 왔습니다”했다. 이에 지공이 “신통을 나타내 보라”하자 지공 앞으로 가서 합장하고 섰다. 

원나라에 머문 11년 중 처음 3년간 지공 문하에서 정진하고 항주 휴휴암과 정자선사에서 수행하다 임제종의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서 법을 받았다. 그 뒤 지공을 세 번 째 뵙고 법맥을 이었다. 평산처림과 지공 두 스승의 법을 이은 것이다. 원나라 황제의 청으로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개당법회를 열 정도로 중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공민왕의 간곡한 청에 의해 오대산 상두암에서 내려와 선법의 요체 심요(心要)를 설하며 회암사를 중창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켰다. 나옹은 원나라 유학에서 접했던 선종사원 가람을 회암사에 적용했다. 선원청규에 의한 생활과 선종가람의 배치, 그리고 간화선 무자화두 등 오늘날 종단의 가람체계, 총림운영, 선원생활, 간화선 수행법이 이 곳 회암사에서 본격적으로 실현됐다. 

나옹선사의 법은 무학 자초(自超)대사에게 이어졌다. 지공화상이 고려를 찾아 법을 펼치던 1327년에 태어난 무학은 1353년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화상을 만나고 당시 원나라 법천사에서 머물던 나옹화상을 친견한다. 나옹은 무학의 법기(法器)를 알아보고 2년 뒤 “서로 안다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다 해도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와 나는 이제 한 집안이다”라며 사제의 연을 맺는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천성산 원효암에서 불자(拂子)를 내려 법맥을 전수한다. 

나옹, 백운경한,  무학자초 등 당대 고려를 대표하는 선승들이 지공 문하에서 공부하고 그 맥이 조선을 거쳐 한국에 까지 이르렀으니 지공이 이 땅에 끼친 영향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나옹선사 부도.
나옹선사 부도.

회암사 중창한 나옹화상

1363년(공민왕 12년) 연경 천수사에서 지공이 입적했다. 10년 뒤 1372년 제자 달예(達睿)가 영골(靈骨)을 모셔왔다. 공민왕이 친히 사리를 모시고 회암사에 봉안했다. 나옹이 스승의 부도와 부도비를 세웠다.

한국의 나란타 대학을 세우기를 염원했던 지공은 고려로 돌아가는 제자 나옹에게 “삼산(三山)과 양수(兩水)가 합치는 중간에 절을 세우면 불법이 융성하리라” 했다. 삼산은 삼각산이며, 양수는 한강과 임진강이다. 스승의 부도를 모시고 나옹은 큰 불사를 했다. 그동안 회암사에는 나옹을 친견하고 법을 들으려는 이들로 주변이 넘쳐났다. 

4년여에 걸친 불사를 회향하려던 1376년(우왕 2) 갑자기 밀양 영원사로 가라는 국왕의 명이 떨어진다. 나옹화상의 법력에 감화를 받은 전국의 백성들로 인해 일손을 멈추고 길이 막혀 생업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실상은 고려 조정을 장악한 성리학자들이 올린 상소 때문이었다.

성리학자들은 개경에서 멀지 않은 양주 땅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나옹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영원사로 가던 나옹은 신륵사에서 열반했다. 대사가 열반 하자 회암사에 부도와 석등을 조성한다. 이듬해는 부도비를 세운다. 3년 뒤 1379년에는 신륵사에도 부도와 비 석등을 조성한다. 
 

무학자초 대사 부도와 비.
무학자초 대사 부도와 비.

무학은 스승이 입적하자 자취를 감췄다. 새로운 선법(禪法)으로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던 스승과 달리 무학은 고려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불법이 수승해도 이를 담을 그릇이 낡았는데 그 물이 어찌 맑겠는가?’ 무학은 이렇게 생각했는 지 모른다. 

무학은 스승을 이어 왕사의 자격으로 회암사에 머물며 법을 펼치지만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회암사를 떠나 명산 대찰을 찾아 수행하다 금강산 금장암에서 열반에 든다. 열반 2년 뒤인 1407년 (태종7년) 회암사에 조선시대 부도 중 가장 걸작이라는 부도를 조성한다. 높고 굵직한 8각 석단에 용 구름 연꽃을 섬세하게 조각하고 그 앞에 쌍사자 석등이 불을 밝히는 대사의 부도는 웅장하면서 아름답다. 

조선 말 이응준이라는 자는 회암사에 조상묘를 쓰면 가문이 성한다는 미신을 맹신한 탓에 삼화상(三和尙)의 부도와 부도비 석등을 훼손했다. 이미 유학자들에 의해 불타 폐허가 된 지 오랜 절에다 또 만행을 자행했으니 그는 이 일로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됐다. 그래서 1828년 경기도 스님들은 훼손된 삼화상의 부도와 비를 다시 세우고 주변에 흩어진 유물을 수습해 제 자리에 모셨으니 바로 지금 세 명의 스승과 제자가 있는 이 곳이다. 

삼산과 양수의 중간에 절을 세우면 불법이 융성하리라 했던 스승의 예언은 맞았다. 불교의 고향 인도에서 꺼진 법등(法燈)을 새로 밝히려 했던 지공의 꿈은 고려 땅 회암사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후 조선 500년간 이 땅의 불교 역시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간화선의 맥은 더 큰 산맥으로 자랐다. 천보산으로 흘러내린 간화선맥은 지금도 힘차게 꿈틀 거리며 나아간다. 
 

회암사지.
회암사지.

양주=박부영 주필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48호/2020년1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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