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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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는 상태를 불경기라고 한다. 그러나 제 아무리 불경기라고 해도 생명활동까지 멈출 수는 없다. 숨을 쉬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밥은 있어야 하고, 가능하면 맛있고 즐겁게 먹을 수 있다면 더욱 좋으리라.

김장을 즈음해서 사찰 경기도 좋지 않다. 이상하게 그렇다. 이맘때만 되면 쪼들린다. 그래도 김장은 담아야 하고 시래기며 우거지도 매달아놓고 무말랭이도 널어놓고 메주를 매달 궁리도 해야 한다.

아무리 돈벌이가 줄고 생산이 위축돼도 겨울나기를 위한 채비는,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증거다. 그 춥고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기필코 봄을 맞고자 하는 의지다. 그래서 같이 살아보자고 여럿이 모여 김장을 돕고 음식을 나눈다.

김장을 마친 초저녁 산 아래 빌라에서 압력밥솥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 켜진 유리창 틈으로 밥이 익어가는 그 소리가 가볍고 쾌활하다. 혼자만 먹자고 압력밥솥에 밥을 짓진 않으리라. 같이 먹을 식구들이 있다는 소리다.

가슴 속 응어리졌던 아픔이나, 남 몰래 울어야만 했던 사연, 삶에 대한 절망 또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빠져나가고, 드디어 마지막 한숨 같은 김까지 다 토하면 밥은 완성된다. 드디어 뽀얀 살결 같은 사랑과 그리움이 밥상 위에 고봉으로 차려진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는 동짓달 저녁을 희망으로 채우며, 긴긴 밤 동안 거룩한 생명을 꿈꾸리라.

라면 스프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면 나는 좀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한 외로움과 고단함이 느껴졌으리라. 그러나 창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압력밥솥에서 밥이 익어가는 소리는 경쾌하고 고소하며 숭고하고 따뜻하다. 

[불교신문3542호/2019년12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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