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불교민속 순례] <20> 도반의 나라, 중국과 한국
[세계 불교민속 순례] <20> 도반의 나라, 중국과 한국
  •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 승인 2019.11.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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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자 김교각스님 활동…범패 수륙재도 전승
중국 안휘성 구화산 육신보전 안에 모셔져 있는 김교각스님상.
중국 안휘성 구화산 육신보전 안에 모셔져 있는 김교각스님상.

우리 곁에 살다간 지장보살

시왕도를 보면 지옥에서 고통 받는 이들 곁에는 늘 지장보살의 서원상(誓願相)이 함께한다. 이때의 지장보살은 합장한 모습으로 그려지게 마련인데, 중생을 향해 손을 내민 적극적인 지장보살을 중국에서 만났다. 안휘성 구화산의 육신보전(肉身寶殿)에는 그릇을 들고 지옥중생에게 음식을 베푸는 지장보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얼굴 또한 전형적인 지장보살상이 아니라, 지옥중생을 향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에서 중생구제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스님의 모습이다. 바로 중국에서 ‘김지장(金地藏)’으로 추앙받는 김교각 스님이다. 

신라의 왕자 신분으로 권력다툼을 피해 719년 바다건너 당나라 구화산으로 들어온 그는 수십 년간 지극히 수행하며 불교를 일으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지장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오늘날 구화산의 99개 사찰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지극한 하화중생으로 삶을 마감해 ‘마침내 진신사리가 되는’ 발원을 품는다. 이는 ‘중생을 제도한 뒤에야 보살과를 이루고, 지옥이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대원으로 평생을 수행하여, 구화산 최초의 등신불(等身佛)이 된 김교각 스님을 따르리라는 발원이다. 

스님이 입적한 뒤 삼 년이 지나도 육신이 썩지 않아 등신불로 모시면서, 사람들은 그가 지장보살의 화신임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의 육신을 모신 육신보전은 365일 향이 꺼지지 않는 구화산의 중심전각으로, 신심 돈독한 중국불자들이 가장 먼저 찾아 성스러운 몸짓으로 배례하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스님의 뒤를 이어 1천년 동안 구화산에서만 15존의 등신불이 이어졌고, 중국인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부처님의 법력으로 깊이 새긴다. 

그들은 중생을 지극히 아끼며 고통에서 구해주는 지장보살이 이곳에 스님의 몸을 빌러 살다가, 마침내 육신보살로 머물고 계심을 굳게 믿는다. 법당에 들어서면 무릎을 꿇은 채 다가가 오체투지로 기도하는 중국불자들의 모습은 경건하기 그지없고, 스님의 뒤를 따르는 후세스님들을 굳건히 응원하면서 구화산의 지장신앙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평생을 수행한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구화산에서, 스님은 지옥중생 곁에서 합장한 손을 풀어 직접 음식을 나누며 우리 곁에 살다간 ‘행동하는 지장보살’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지의. 관욕에서 명부의 옷인 지의를 태워 해탈복으로 바뀌게 함.
한국의 지의. 관욕에서 명부의 옷인 지의를 태워 해탈복으로 바뀌게 함.

범패의 전승이 시작된 곳 

“강사가 법석에 앉을 때 대중이 같은 목소리로 부처님을 찬탄하는데, 그 음곡(音曲)은 모두 신라의 것이지 당나라 음이 아니다. 자리에 오르고 나면 한 승려가 범패를 외는데 이는 전적으로 당나라의 풍이다.” 839년 당나라 안의 신라사찰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 열린 강경의식을 보고, 일본 원인(圓仁) 스님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담은 기록이다.

794년 입적한 김교각 스님의 육신을 등신불로 모시며 구화산에 지장신앙이 점화되고, 그로부터 삼십 년 뒤인 824년에 안휘성과 맞닿은 산동성의 신라인거류지 신라방에 적산법화원이 세워진다. 장보고가 세운 이 사찰은 250여 명이 기거할 수 있는 규모였고, 일상의 법회와 의식은 물론 명절마다 승속이 함께하는 다채로운 세시풍속이 이어졌다. 845년 당 무종이 일으킨 법난으로 소실되어 단 21년간 존속한 사찰이었지만, 그곳에 일곱 달 정도 머문 원인스님의 기록은 소중한 고대 신라불교의 정보를 담고 있다. 

앞의 내용은 강경의식 때 대중은 신라풍(新羅風)으로, 한 스님은 당풍(唐風)으로 범패를 노래했다는 기록이다. 우리의 범패는 830년경 진감선사(眞鑑禪師)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것이니, 이 무렵 당의 신라스님들도 범패에 능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대중이 함께 부른 신라풍의 염불은 향가로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삼국유사〉에 760년 경덕왕의 청을 받은 월명대사(月明大師)가 “소승은 향가만 알뿐 성범(聖梵)은 서투르다”며 향가로 도솔가를 지어 불렀듯이 말이다. 

그로부터 천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우리의 범패는 한국적 토양과 정서에 맞는 독자적인 불교음악으로 전승되어왔다. 이에 비해 중국본토에서는 역사의 질곡 속에 범패의 맥이 사라졌고, 대만 또한 새로운 승단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바뀌고 표준화되었다. 중국불교에서 대만의 전통을 참조하는 가운데 한국범패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는 이유이다. 무형의 유산은 오랜 기간 단절되고 나면 복원이 어렵게 마련이니, 우리가 가진 소중한 불교자산을 어떻게 지켜야할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중국의 지의. 망자가 저승에서 입도록 태워 보낸다.
중국의 지의. 망자가 저승에서 입도록 태워 보낸다.

지의(紙衣), 그리고 관욕

얼마 전 조상의례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중국학자가 발표하고 필자가 토론하는 과정에, 직접 종이로 지의를 접어 발표자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한국불교에서 수륙재 등 천도재를 지낼 때 백지로 바지저고리를 접어 하단 관욕(灌浴)에 쓰는 데 비해 중국에서는 의식문만 염송하기 때문이다. 발표자는 어릴 때부터 우리가 종이접기로 즐겨 만들었던 바지저고리를 본 적이 없어 신기해하며 그것을 중국으로 가져갔다. 

수륙법회(水陸法會)는 양나라 초대황제인 무제가 의식문을 만들게 하여 505년경 처음 설행되었고, 송나라 이후 명ㆍ청대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민간에서 활발히 행해졌다. 구화산에서도 김지장 스님의 정신을 받드는 수륙법회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듯이, 개혁개방과 함께 단절되었던 수륙법회가 중국 각지에서 불교최대의 의례로 되살아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에 수륙재가 처음 들어와, 1342년에 죽암(竹巖) 스님이 중국의 의식문을 참조해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중례문)〉를 펴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문에는 중국에 없는 ‘가지화의편(加持化衣篇)’이 독립된 절차로 편성되어 있어 주목된다.

‘가지화의’란 관욕을 할 때 영가가 목욕을 함으로써 ‘명부의 옷(冥衣)이 해탈복으로 변하게 된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업을 씻고 해탈복을 갖추어 입는 것만으로 간략히 다룬 데 비해, 우리는 명부의 옷이 새 옷으로 바뀌는 ‘화의’의 과정을 중요하게 의미화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관념적ㆍ밀교적 성격의 관욕이 발달했고, 그 과정에서 ‘가지화의’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명부의 옷을 태우기 위한 용도로 지의가 중요하게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관욕대상도 주로 영가에 해당되어 생전의 업을 씻어주는 뜻을 지닌다.

이에 비해 중국불교에서 관욕은 주로 불보살을 대상으로 하여 경배와 찬탄의 뜻을 지니며, 수륙법회의 하단관욕은 의식문 염송으로만 진행된다. 중국에서도 관욕과 무관하게 망자가 저승에서 입을 용도로 지의를 만들어 태우는 문화는 나란히 전승되고 있으며, 이때의 지의는 화려하고 원색적이다. 

관욕과 지의를 사례로 들었듯이, 같은 목적과 의식문으로 출발한 두 나라의 수륙재 또한 절차와 방식에서 서로 많이 다르다. 수륙재는 특히 종합불교예술의 성격을 지닌 의례이기에 비교요소가 다양하여 앞으로 두 나라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무궁무진하다. 
 

의례를 마치고 지전을 태우는 장면. ⓒ大中國
의례를 마치고 지전을 태우는 장면. ⓒ大中國

지전(紙錢) 태우기

중국인들의 ‘태우기 문화’는 참으로 특별나다. 사찰이나 도관에서 의식으로 행하는 것은 물론, 집 앞에서도 거리에서도 ‘태우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명절을 제외하고도, 중국에는 망자를 위한 4대 절기로 봄철의 청명절과 상사절(上巳節. 삼짇날), 가을철의 중원절과 한의절(寒衣節)이 있어 이때마다 전국에 불이 지펴진다. 한의절은 조상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제사를 지내며 겨울옷을 보내드리는 날로, 진시황 때 맹강녀(孟姜女)의 열녀전설에 따라 솜옷을 만들어 태운다. 

조상제사를 지낼 때 그들은 종이돈과 종이저승용품[紙冥器]을 태운다. 종이로 만들어놓은 옷, 음식과 가전제품, 차와 집 등 온갖 생활용품을 구입해 태움으로써 망자가 저승에서 이용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종이돈 지전(紙錢)이다. 사후에도 돈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돈을 저승에 보내는 방법은 태움으로써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이 지닌 보편의 심성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유생은 물론 현대학자들도 유교제사에 이러한 요소가 개입된 것을 불교의 영향력에서 찾고 있다. 천도재에서 망자를 위한 지전을 쓰고 의례에 사용한 모든 것을 태우는 관습, 불교의 장례법인 화장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20세기의 한 기록에서, 가정마다 조상제사를 지내며 여러 개의 봉투를 준비하는데 속에 지전과 편지를 넣고, 겉에 조상의 이름과 보내는 이의 이름을 각각 적어 태우는 풍습을 소개했다. 오늘날 생전예수재에서 지전과 함합소(緘合疏)를 봉투에 넣어 태우는 것과 흡사하다. 

불교에서 화장을 하고 옷을 태우는 것은 공의 상태로 돌아갔음을 뜻하며, 이승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끊기 위함이다. 그러나 신라의 월명대사(月明大師)가 누이의 재를 지낼 때 바람이 불어 지전이 서쪽으로 날아가자 “바람이 지전을 날려 누이의 노자로 삼게 했구나”라고 읊었듯이, 망자를 위해 무언가를 태우는 이들은 저승길에 필요한 것을 챙겨 보내는 마음이 담기게 마련이다. 이러한 태우기는 인류보편의 민속신앙이며, 불교는 유교에서 얻지 못한 인간의 종교적 공감대를 함께하는 역사 속에서 성장해왔다. 
 

몽산시식을 하는 스님.그림=구미래
몽산시식을 하는 스님. 그림=구미래

[불교신문3538호/2019년11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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