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교 건너 김구 선생 삭발바위에 올라 눈을 감으니…

일본군 살해 백범 김구 선생
脫獄 후 三南 거쳐 들른 곳
망설임 끝 출가, 법명 圓宗
자경문 주력 등 불교 공부

삭발바위 명상길 남아있어
해방후 방문 심은 향나무도

마곡사 전경, 백범선생이 이 곳에서 출가하여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했다.
마곡사 전경, 백범 선생이 이곳에서 출가하여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했다.

공주 마곡사는 예산 수덕사와 함께 충남을 대표하는 교구본사다. 행정수도 세종시가 인근에 들어서 그 위상이 더 높아졌다. 종단이 운영하는 한국문화연수원도 마곡사에 있다. 예로부터 경치가 뛰어나 단풍이 아름다운 갑사와 더불어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 했다. 

경치가 아름답고 행정수도의 중심지 마곡사를 더 유명하게 만든 인물이 있으니 바로 백범(白凡) 김구선생이다. 선생은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행했다. 일본이 다시 제국주의 야욕을 숨기지 않는 요즘 김구선생의 자취를 찾았다. 

지난 8월20일 무더위가 한창일 무렵 찾은 마곡사는 휴가를 보내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일본과 갈등 때문인지 김구선생이 기거했던 백범당에서 기념 사진을 찍거나 선생이 다녔다는 명상길을 따라 걷는 관광객도 보였다. 

하은당 스승으로 출가 

마곡사는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정감록>에서도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十承地)의 명당이라고 했다. 그 주변 경치도 절경이다. 조선시대 한 문인은 “절은 고갯마루 아래에 있었고, 10여리 길가에 푸른 시냇물과 흰 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고 감탄했다. 

백범선생이 마곡사에서 출가한 이유는 감옥을 탈옥해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일부는 위장 출가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선생은 많은 망설임 끝에 출가를 결행했다.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인근에서 역적으로 몰려 상민으로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학 접주, 의병, 청나라 유람 등 질풍노도의 10대를 보낸 선생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군을 보고 민비를 살해한 미우라 공사 일행으로 여겨 살해한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집에 있다 체포된 백범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고종의 재가가 나기 전 사형 사유를 눈여겨 본 관리에 의해 구사일생 살아나고 재판정에서 사유를 떳떳이 밝혀 유명인사가 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신학문을 접하고는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왕정옹호론자에서 공화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리고 젊을 적 치기어린 행동을 뉘우치고 더 크고 긴 호흡의 부국강화를 꿈꾸며 탈옥하여 삼남지방을 떠돌며 도피생활을 한다. 

긴 도피생활에 지칠 무렵 공주 갑사(甲寺)에서 만난 이서방을 따라 마곡사로 갔다. <백범일지>는 출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마곡사로 가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서방은 홀아비로 몇 년 동안 사설 글방의 훈장으로 지냈고, 지금은 마곡사로 가서 중이나 되어 일생을 편안하게 지내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도 그리하기를 권했는데, 나도 얼마간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갑작스레 생긴 문제였으므로 섣불리 결정할 수 없어서 이야기만 하였다. 하루 종일 걸어서 마곡사 남쪽 산꼭대기에 오르니, 해는 황혼인데 온 산에 단풍잎은 누릇누릇 불긋불긋하였다. 가을 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 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 하였다.”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2년간의 감옥생활과 사형선고와 탈옥, 영호남과 충청도로 긴 도피생활에 지친 20대 초반 선생의 복잡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출가해서 세속을 다 잊고 편히 살 것인가, 아니면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데 몸 받칠 것인가? 백범은 그 심정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

 

백범 김구선생이 출가해서 기거했던 전각을 복원하여 백범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념관 역할을 한다. 오른쪽은 선생이 귀국 후 방문한 뒤 심은 향나무.
백범 김구선생이 출가해서 기거했던 전각을 복원하여 백범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념관 역할을 한다. 오른쪽은 선생이 귀국 후 방문한 뒤 심은 향나무.

“지옥에서 극락, 세간에서 출세간”

선생은 마곡사에 들어설 때까지 삭발 결심을 하지 못했지만 주변 스님들의 권유로 마침내 결행한다. <백범일지>는 출가하여 삭발하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얼마 뒤에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법당에서 종이 울리고 향적실(香積室)에서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각 암자에서 가사를 입은 스님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나도 검은 장삼과 붉은 가사를 입고서 대웅보전으로 인도되었다. 곁에서 덕삼이가 부처님께 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은사 하은당이 내 승명을 원종(圓宗)이라 명명하여 불전에 고하였다. 수계사는 용담(龍潭)이란 점잖은 화상으로 경문을 낭독하고 오계를 일러주었다. 예불을 마친 후에는 노스님 보경당을 위시하여 절 안에 있는 나이 많은 대사들에게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절을 했다. 승배(僧拜)를 연습하고 ‘진언집’과 ‘초발자경’ 등 간단한 규칙을 배웠다.”

마곡사에는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가 있다. 마곡사와 공주시가 삭발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푯말을 세웠다. 마곡사 생태농장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 솔바람 명상 길’도 놓았다. 삭발 바위 위에서 마곡천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절경이다. 

원종스님은 수행자 생활을 충실하게 했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길었으며 그동안 갖고 있던 공명심도 모두 헛된 망상임을 배웠다. 민비의 원수를 갚았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지만 마곡사에서는 똑같은 스님일 뿐이었다. 스승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스승 하은은 원종에게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고명한 중은 되지 못하겠다. 얼굴이 어쩌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 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거라”며 다그쳤다. 

선생은 과거에 낙방하고 관상쟁이로 먹고 살기 위해 관상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자신의 얼굴이 하나도 귀한 구석이 없음을 알고 실의에 빠진 적이 있다고 일지에 적었다. 그런데 또 얼굴 때문에 타박받은 것이다. 선생은 “망명객이 되어 사방을 떠돌아 다닐 때에도 내게는 영웅심과 공명심이 있었다. 그런데 중놈이 되고 보니 이상과 같은 생각은 허영과 야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불씨(佛氏) 문중에서는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악마와 같은 생각이었다”고 달라진 상황을 받아들였다. 
 

김구 선생이 주석했던 암자 백련암.
김구 선생이 주석했던 암자 백련암.

6개월 수행 후 만행길

백범은 마곡사에서 6개월을 보내고 금강산으로 공부한다고 떠나 평양 서쪽 대보산 영천암에 1년여 간 머문다. 사형 혜명의 걱정대로 그의 불심은 점점 약해져서 비승비속으로 살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다. 선생은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해 청정적멸의 도법(道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했다”고 적었다. 

2년여의 짧은 산중생활이었지만 백범은 불교를 접한 뒤 마음이 차분해지고 참을성이 많아졌다. 분노와 결기에 찬 행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수행생활을 통해 배웠다. 선생에게 마곡사에서의 수행생활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해방된 뒤 임정요인들과 귀국한 뒤 사형선고를 받았던 인천형무소에 이어 곧바로 마곡사를 방문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친필 휘호 남겨 

1946년 김구선생은 마곡사를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수행할 당시 스님은 한 명도 없어 많이 아쉬워했다.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상으로 나를 환영하여 주나, 48년 전의 승려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고 적었다. 선생은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를 남기고 기념으로 무궁화와 향나무를 식수했다.

백범 선생이 출가했던 장소로 알려진 백범당은 원래 건물이 없었으나 역사 고증을 거쳐 조성했다. 선생의 진영(眞影)과 당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이 마곡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과 눈을 사로잡는다. 

마곡사는 선생이 서거하자 49재를 지냈으며 지금도 서거일에 추모다례재를 봉행한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잊지 않는 마곡사다. 선생도 마곡사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선생의 마음이 대광보전 앞에 푸르게 자라는 향나무에 담겨있다. 김구선생에게 마곡사는 영원한 고향이다. 
 

마곡사 대웅보전.
마곡사 대웅보전.
백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터.
백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터.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명상길을 조성했다.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명상길을 조성했다.

마곡사=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20호/2019년9월25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