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두의 고승전] <38> 보문당 정일스님
[이진두의 고승전] <38> 보문당 정일스님
  • 이진두 논설위원
  • 승인 2019.08.2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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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법 배우겠다 제 발로 오니 얼마나 고맙노”

“절에 주인이 따로 있느냐
불자라면 모두 주인 아닌가
내 식구 네 식구 어디 있나”
법회, 연중 쉼없이 이어가며
대불련 대불청 등 신행단체엔
경내 사무실 제공 활동 뒷받침

어린이에서 중·고등·대학생
청년불자, 어른에 이르기까지
‘불교포교ㆍ신행요람’ 정평
은사 경전강설 뜻 꾸준히 이어
2년 전 ‘참회산림’ 30주년
‘경전산림’도 60주년 넘겨
“제 발로 불교 배우겠다고 오는 게 얼마나 고맙노.” 정일스님은 이런 마음으로 부산불교격동기인 1970년대부터 50년간 포교를 해 오늘날의 부산불교가 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한 스님이다.
“제 발로 불교 배우겠다고 오는 게 얼마나 고맙노.” 정일스님은 이런 마음으로 부산불교격동기인 1970년대부터 50년간 포교를 해 오늘날의 부산불교가 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한 스님이다.

보문당(普門堂) 정일(淨日, 1934~ 2014)스님은 불교도시(佛都)라 일컫는 부산에서 도회지 포교의 모범을 보인 선지식이다. 부산 동구 초량 소림사에 주석하면서 도량을 중창, 오늘날 여법한 대도량으로 일구었다.

스님의 포교원력은 어린이에서 중·고등·대학생, 청년불자, 어른에 이르기까지 널리 뻗쳐 소림사를 불교포교의 요람으로 널리 알렸다. 법회를 연중 끊임없이 이어갔고 대불련 대불청 등 신행단체에게 도량의 당우(堂宇)를 사무실로 쓰게 해주어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하고 후원했다. 

산중의 유명한 절도 아닌 도회지 사찰에서 절을 운영하며 포교활동을 해 나간다는 것은 여간한 원력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절집의 주지 소임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정일스님은 그러나 이왕 맡겨진 일이라면 열정과 성심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굳은 다짐으로 40여년 소림사를 이끌어 왔다. “부처님을 알고 부처님과 닮은 삶을 살고자 출가한 것이 아니냐. 젊었을 때 더 많이 배우고 더 열심히 노력해라. 나이 들어 후회한들 그 땐 이미 늦은 거다”라면서 당신이 못다한 공부를 안타까워하며 제자들을 다그쳤다. 

상좌들에게는 자기 자신에게 맞는 공부 길을 택하여 그 길을 꾸준히 가라면서 개성과 자질을 살리는 수행으로 이끌었다. 경전을 연구하라, 참선수행에 전념하라는 등으로 어느 한 곳으로만 가게 하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스스로의 길을 제 발로 열심히 가게 했다. 당신은 원하는 만큼 공부를 못했지만 상좌들에게는 후회 없이 공부하도록 적극 뒷받침 했다. 

스님 문하에는 외국 유학한 상좌도 석·박사도 있다. 상좌들 수행도 열심히 하도록 쉼없이 스스로를 다그친 정일스님. 

“절에 주인이 따로 있고 객이 따로 있느냐. 불자라면 모두가 주인 아니냐. 또한 내 식구 네 식구가 어디 있느냐.” 

금광스님 은사로 출가 

정일스님은 1934년 1월16일 경남 창원시 동면에서 이규석 거사와 한복희 보살의 1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52년 19세 때 소림사에서 금광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1956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스님의 은사 금광스님은 운문사 초대 주지를 역임한 스님이다. 통도사 강주 혜륜스님을 모시고 운문사에 비구니 강원을 설립했으며 자신도 경학에 밝아 비구니로서 드물게 강단에서 경전을 강설했다. 금광스님은 1947년부터 <화엄경>을 10년간 강설했고 이어 <법화경>을 1957년부터 10년 간 강설했다. 

소림사는 1966년 금광스님 열반 후에는 1967년부터 <열반경>을 강설하는 법회를 10년 간 했다. 

정일스님은 1970년 소림사 주지를 맡았다. 당시 주지를 맡고 있던 사형이 입적했다. 다른 사형들이 정일스님에게 주지를 맡으라 했다. 정일스님은 주지를 하기 싫어 도망을 가기도 했단다. 그런데도 사형들이 “우리가 도와줄게”해서 맡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그렇게 해서 맡은 주지이지만 이왕 내게 주어진 소명이니 열성을 다해 일을 하자고 원력을 세우고 소림사를 이끌어 왔다. 

1950년 대 초반 종단은 비구·대처분쟁에 휩싸였다. 청정비구승가를 표방한 스님들은 일본불교 잔재인 대처승을 절에서 내쫓으려 하고 이에 대항하는 대처승은 법정 소송으로 맞대응, 종단은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시대상황에서 운문사를 비구니가 맡게 되었다.

정일스님이 운문사에서 지낼 적 이야기다. 

“당시 운문사는 지금처럼 공부에 몰두할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도량정비도 예삿일이 아니었지요. 큰법당 지붕위에 잡초가 무성했어요. 여자이지만 저희들이 지붕에 올라갔지요. 풀을 다 뽑았습니다. 깨진 기와를 새것으로 갈아 얹는 일도 여자라고 마다할리 있습니까. 일꾼도 그런 일꾼이 없었지요. 물론 일꾼을 살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우리가 해야 했지요.

운문사 가는 길은 지금은 참 편하지요. 아스팔트길이 잘 깔려 승용차가 쌩쌩 가지 않습니까. 그 때를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듭니다. 기차를 타고 경산에서 내리지요. 동곡재를 넘어가면 큰 개울이 있어요. 지금 운문댐이 된 그 개울입니다. 겨울에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맨발로 개울을 건넜어요. 차디찬 물에 온 몸이 시리고 아픈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그렇게 한번 나들이에 하루가 다 가지요. 먹고 입는 것 또한 말할 것 없지요. 전쟁 후라서 온 나라가 가난했고 모두가 못 먹고 헐벗고 살 때 아닙니까. 절도 마찬가지고요. 밥 한 끼 먹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찌잉 합니다.

그 때 일들은 지금 얘기하면 듣는 이들은 이해하기 어렵지요. ‘정말 그랬나?’하는 반응이지요. 우리는 그 때 그렇게 살았어요. 그리 살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해인사에서는 김장김치 무 한쪽이면 밥 한 끼 먹기에 족하다는 말도 나왔으니까요. 시주의 은혜를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도 출가수행자의 마음가짐은 흐트러지지 않았지요. 되레 더 굳어졌어요. 우리가 어디 잘 먹고 잘 지내려고 절에 온 게 아니잖아요.” 

“믿음(信心)이 바로 정진의 근원이요. 힘이다. 믿음이 없이는 공부를 이룰 수 없다. 이 생각이 굳게 서지 못하고 의심하거나 주저하면 큰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다.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범부(凡夫)의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면서 제자를 경책한 정일스님. 

“도회지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려면 어려운 일, 겪기 힘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은사 스님께서는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부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지 말라고 늘상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부처님 법에 따라 충실히 하라고 고구정녕 일러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회상하는 스승의 가르침은 불자들의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긴다. 

정일스님은 당신의 스승 금광스님의 뜻을 이어 소림사에서 불경(佛經) 강설법회를 꾸준히 이어왔다. 수십 년을 이어온 산림(대법회)에는 전국의 큰스님들이 법상에 올라 깊고 넓은 법문으로 불자를 일깨웠다. 2017년 소림사는 ‘참회산림 30주년, 경전산림 60주년’을 맞았다. 정일스님은 큰스님들의 법문을 책자로 엮어 펴내기도 했다. 

정일스님과 상좌들의 역사

<山林(산림)>이라 이름 한 이 두툼한 책은 소림사와 정일스님 그리고 상좌들이 소림사에서 지낸 역사이기도 하다. 참회산림은 불자들이 자신의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고 잘못된 생활을 반성하며 새로운 신행을 다짐하는 법회다. 불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게 하고 새로운 각오로 경전공부에 정진하도록 정일스님은 참회산림과 경공부법회를 병행하여 포교를 했다. 스님의 포교열정을 일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학생법회 때다. 학생들이 법회를 맞아 법당에 몰려오면 땀냄새 발 고린내가 법당 안에 진동한다. 상좌들은 이 냄새에 코를 싸쥐고 돌아서곤 했다. 그럴 때면 스님은 이렇게 상좌들을 나무랐다. 

“그래, 그게 싫고 역겨우면 너희들이 길거리에 학교 문 앞에 나가서 홍보지 나눠주며 큰소리를 쳐라. ‘여기 보시오. 불교를 믿으시오.’ 그리해라. 마이크로 큰소리 내고 북도 쳐라. 느그들이 그리하기 싫으면 오는 학생 잘 보듬어 줘라. 제 발로 부처님 배우겠다고 오는 게 얼마나 고맙노.”

정일스님은 2014년 2월18일 입적했다. 장례식은 2월20일 소림사에서 봉행했다. 세수 81세 법랍 62년. 

스님 입적 후 상좌들은 소림사를 떠나 제각기의 법연으로 각자 제자리에서 스승의 뜻을 받들고 수행하면서 스승같이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스님이 주지로 있던 시절 부산 대불련 대불청 회원들도 이제는 부산불교계의 원로가 됐다. 스님의 법향은 상좌나 신도들에게 아직도 짙게 풍기고 있다. ‘부산불교’는 정일스님을 잊을 수 없다. 

[불교신문3513호/2019년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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