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동호 상류 옛절터 ‘무장사’
김춘추는 왜 이 깊은 계곡에
무기를 감추었을까

그 깊은 생각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안 되는 후손에게는
서로를 죽이는 무기로 다시 …

고운기

경주의 보문관광단지에서 포항 가는 옛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빠져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암곡이라는 계곡이 나온다. 그러니까 덕동호의 상류에 있는 계곡이다. 계곡이 다한 곳에 무장사(鍪藏寺)라 불리던 옛 절터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절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윽한 골짜기는 삐쭉 솟아나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 그윽하고도 깊어서 저절로 빈 마음이 생기니, 곧 마음을 편히 하고 도를 즐길만한 신령스런 곳이다.”

저절로 생긴 빈 마음에 도를 즐길만한 곳…. 그래서였을까, 경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이곳을 눈 여겨 보았다. 먼저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곧 명덕왕으로 추봉된 대아간 효양이 숙부를 기리기 위해 절을 지었다. 처음 절이 지어진 기록이다. 

그런가 하면 제39대 소성왕의 비 계화왕후에게는 슬픈 사연이 있다. 왕후는 왕이 먼저 죽자 마음이 우울하고 허황하기만 했다. 슬픔이 지극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마음은 가시에 찔리는 듯 했다. 그래서 왕의 밝고 아름다움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로 하였다. 왕후는 서방에 큰 성인이 있어 곧 미타라 하는데, 지성껏 모시면 잘 구원하여 맞이해 준다는 말을 들었다. 서방의 성인이란 곧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왕후는 온갖 호사스런 옷을 시주하고, 창고에 가득 쌓인 재물을 내놓아 좋은 기술자를 불러다 미타상 하나와 여러 신을 만들어 모셨다. 

원성왕이나 소성왕이나 모두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 간 사람이다. 전쟁과 권력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곳은 마음의 평안을 찾는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본디 험한 계곡이다. 바위는 험준하고 물살은 세서 기술자가 손을 대지 못하고, 모두들 다가가기도 불가능한 곳이라 했다. 그러나 땅을 골라내 평탄한 터를 만드니, 절 채를 지을 만 했다. 완연히 신령스런 터전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이 잘했다 칭찬하였다. 그래서 끝내 절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장사’라는 이름은 무기를 보관한 창고라는 뜻이다. 어쩌다 절 이름이 이렇게 붙여졌을까? 삼국유사에서는, “태종이 삼한을 통일한 다음, 계곡 안에 무기와 투구(鍪)를 감추어(藏) 두었다. 그래서 이름 지었다”는 기록을 추가하였다. 

태종 곧 김춘추는 왜 이 깊은 계곡에 무기를 감추었을까.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않겠다는 마음일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방책일까. 어느 쪽이건 매우 지혜로운 판단의 결론이다. 무기는 함부로 휘두르지 말아야 하지만, 없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태종의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그러나 깊고 먼 생각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안 되는 후손에게 그것은 서로를 죽이는 무기로 다시 쓰였다. 실로 원성왕이나 소성왕은 그래서 죽었다. 아예 칼과 창을 녹여 쟁기와 보습을 만들어야 했다.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 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세는 좀체 안정되지 못하였다. 흑인 사이에도 분열의 연속이었다. 급기야 유혈사태로까지 번지자 만델라는 호소하였다. “여러분 손에 들린 칼과 총을 바다에 버리십시오.” 나라는 진정되고 만델라는 대통령에 뽑혔다. 

헤밍웨이의 명작 <A Farewell to Arms>는 ‘무기여 잘 있거라’로 번역하지만, 우리말 ‘잘 있거라’는 이중의 뜻을 지녔다. 헤어짐이기도 하고 감춤이기도 하다. 감춘 무기는 언젠가 누구에게 들이댈지 모르는 무기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분명히 헤어져야 한다.

[불교신문3512호/2019년8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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