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19> 전쟁 속에서 피어난 극락정토 - 고도령⑪
[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19> 전쟁 속에서 피어난 극락정토 - 고도령⑪
  • 조민기 글 견동한 삽화
  • 승인 2019.08.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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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신하의 등에 업히면 이 무슨 망신…”

백제의 반격

처음 나선 바닷길은 힘겨웠다. 미해는 정신이 있을 때는 토하고 기력이 다하면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여러 날이 흘렀고 미해의 얼굴은 초췌해지고 몸은 반쪽이 되었다. 드디어 왜국에 도착했을 때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땅을 디딘 미해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좀 쉬었다가 천천히 출발해도 됩니다, 왕자님.”

박제상은 파리해진 미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벌써 시일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이제 곧 신국의 왕자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궁성에 전해질 텐데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감시를 목적으로 동행한 실성의 측근은 고압적으로 나왔다.

“뱃길로 오는 동안 멀미가 심하여 왕자님께서 몸도 많이 축나고 다리에 힘도 풀리셨네. 한숨 돌리고 출발해도 되지 않겠는가?” 

미해의 앞을 막아선 박제상은 이를 갈며 실성의 측근을 노려보았다. 그 기세에 움찔한 실성의 측근은 자신도 모르게 반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퉤 소리를 크게 내며 침을 뱉었다. 박제상의 손을 잡고 있던 미해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제상, 나 이제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왕자님,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몸이 많이 약해지셨는데 풍토병이라도 걸리면 큰일입니다. 왕자님은 신국을 대표하는 분이니 저들은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왕자님의 털끝 하나라도 잘못되면 신국도 태자 전하도 저, 박제상도 결코 보고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국으로 돌아오시는 날까지 건강하게 잘 계셔야 합니다.”

박제상은 한 마디 한 마디를 강조했다. 

“응”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해의 모습에 박제상은 가슴이 아려왔다.

“제 등에 업히시지요, 왕자님”

박제상은 미해에게 등을 내밀었다.

“안돼, 난 이제 아기가 아니라 그대의 말처럼 신국의 왕자라고.”

“맞습니다. 질자가 신하의 등에 업히면 이 무슨 망신이란 말입니까?” 

“잊지 말게. 신국은 엄연히 왜국의 상국일세. 마립간께서 아량을 베풀어 왕자를 보내셨는데 오랜 여정으로 지친 왕자를 맞으러 나온 사람 하나 없으니 이는 분명 신국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네. 내 왜왕을 만나면 이를 분명히 따질 것이야. 그리고 나는 신국의 신하인데 신하가 왕자를 업어드리는 것이 충심이지 어째서 망신이란 말인가. 충심도 구분하지 못하는 자네를 마립간께서 얼마나 더 곁에 두실지 내 지켜보겠네. 왕자님, 어서 업히십시오.”

실성의 측근은 박제상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왜국에 질자로 간
신라 왕자 미해와
신하 박제상은
모멸감에 치를 떨고 

백제와 왜 연합군 침략에
분노하던 담덕 앞에 선 
고도령은 눈시울 붉히며 

고구려에 보탬 될 것이라며
아들 아도의 출가를 …


402년, 왜국 아스카 

미해는 박제상의 등에 업혀 머리를 기댔다. 긴장이 풀리며 스르르 잠이 올 것 같았다. 미해의 몸은 앙상하고 가벼웠다. 박제상은 눈물을 참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편히 쉬십시오.”

멀리 궁성이 보이자 미해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내려달라고 했다. 왜국의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은 짧고도 길었다. 미해를 앞세운 박제상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 뒤 두 손을 깍듯하게 모으고 뒤를 따랐다.

“신국의 왕자 들었사옵니다.”

왜국의 신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외쳤다. 미해는 자신도 모르게 절을 하려 했으나 박제상은 얼른 미해를 막으며 속삭였다.

“왕자님이 여기 오신 것은 신국이 저들에게 커다란 선의를 베푼 것입니다. 허나 저들은 이미 왕자님을 맞으며 큰 무례를 범했으니 절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군만마처럼 자신의 곁을 지키는 박제상을 보며 미해는 용기를 얻었다. 고개를 꼿꼿이 든 미해는 박제상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해가 고개를 숙이지 않자 어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왜국의 왕이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국의 마립간께서 적지 않은 성의를 보이셨으니 우리 왜국도 받은 만큼 성의를 보이겠소.”

“신국은 귀국에 크나큰 성의를 베풀었소. 왕자께서는 태자 전하의 친동생이시며 신국에서 더없이 존귀한 분이시오. 왕자께서 스스로 두 나라의 화친을 위해 이곳까지 오셨으니 응당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이오.”

박제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비웃는 듯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벌한 분위기를 느낀 미해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박제상은 미해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이보시오, 박제상. 그대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소. 계림에서 황금빛 알을 깨고 나와 신국을 세우신 박혁거세 거서간의 후손이라지. 과연 기개가 대단하군. 헌데 말이오, 우리는 신국과의 화친이 전혀 아쉽지 않소. 오히려 지금까지처럼 화친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지. 신국이 지금까지 우리 왜국과의 전쟁에서 몇 번이나 이겼을 것 같소? 우리 왜국에게 있어 신국은 그대의 시조인 박혁거세 거서간처럼 황금알을 주는 존재라오.”

박제상은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그때 실성의 측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두 나라가 칼을 맞댄 적은 많으나 자주 보면 정이 든다고 마립간께서는 이제는 신국과 왜국이 서로 친근해질 때라고 말씀하셨사옵니다. 부디 아량을 베푸소서.”

“싸우다 정이 든다. 하하하, 마립간께서는 참으로 재미난 분이시군.”

왜국 왕 옆에 서 있던 목소리가 간드러진 신하가 비웃듯 박제상과 미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태자의 동생을 보내면서 아량을 구하다니 참 염치도 없소. 백제에서는 태자 전하가 직접 오시지 않았습니까? 태자 전하의 신분이 귀합니까, 태자 전하의 동생 신분이 귀합니까? 이를 비교할 수 없지요.”

“그뿐인가. 백제의 왕께서는 천금을 주고도 얻기 어려운 귀한 명마 두 필과 우리 왜국에 없는 학자를 보내주시지 않았는가. 이 정도는 되어야 화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게지.”

“맞사옵니다. 맞사옵니다. 허나 우리 왕자님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이곳에서 오래도록 지낸다면 왜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혀 왜국의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실성의 측근은 왜국의 왕을 보면서 왕자가 아직 어리다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왕자가 어리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박제상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눌지 태자가 왕위에 오르기만 하면, 아니 그 전에 새털 같은 기회라도 있으면 당장 미해 왕자를 신국으로 데려오겠다고 다짐했다. 

404년, 고구려 평양성

담덕 앞에서 무릎을 꿇고 건장한 남녀를 바치며 대왕의 노비가 되겠다던 백제의 왕은 이 약속은 아주 간단하게 깨버렸다. 백제와 왜의 연합군은 고구려가 연과 전쟁을 치르는 사이 갑자기 고구려를 급습했다. 담덕은 평양의 정예병을 동원하여 총력전을 펼쳤고, 간신히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막아냈다. 

“백잔, 저것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전에는 잠을 편히 못 자겠군.”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끝내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간 것을 확인한 담덕은 분노하며 말했다.

“국내성으로 돌아가야겠다. 군사를 정비하여 백잔을 선제공격할 것이다.”

국내성으로 돌아간 담덕은 며칠 뒤 이불란사에서 고도령과 아도스님을 만났다.

“연과의 전투가 한창일 때 백잔과 왜의 공격을 받아 힘드셨다 들었습니다. 병사들의 기력이 많이 소진되었겠지요. 소식을 듣자마자 아도스님께서 스님들을 전쟁터로 보내셨습니다. 시신을 수습하고 염불하는 일을 지시하셨지요.”

담덕은 아도스님을 향해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고구려 병사들의 영혼은 분명 극락왕생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다시 고구려 백성으로 태어나길 원하고 고구려의 백성으로 태어난다면, 그때는 전쟁터가 아닌 논에서, 밭에서, 집에서 머리카락이 하얗고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되어 극락으로 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담덕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대왕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진 고도령이 입을 열었다. 

“저의 아들 아도를 출가시키고자 합니다. 제가 대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기도이지만 아도가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면 훨씬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글 조민기 

[불교신문3508호/2019년7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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