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이 되고자 하는가?

윤회의 족쇄 모두 끊어내려면
유신견 계금취견 의심 버리고
욕망 집착 아만 무명 벗어나야

 

등현스님

생의 목표가 삶의 의미를 결정짓게 된다. 불교에서 생의 목표는 아라한, 보살,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 크게 나눠 볼 수 있는데, 아라한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일상의 지식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아라한이 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살이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일상의 지식은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 모든 지식들이 중생을 도와주고 교화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생의 목표에 따라서 삶의 의미와 내용이 달라진다. 

분별설부와 설일체유부의 최고의 이상향은 아라한이다. 그리고 아라한은 윤회의 쇠사슬(족쇄)을 모두 끊어버린 이들이다. 분별설부에서는 10가지 족쇄, 설일체유부에서는 98개의 족쇄를 말한다. 물론 이들에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는데, 다만 설일체유부는 법수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10가지 족쇄 중 앞의 세 가지 곧 유신견(有身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의심(疑心) 등의 족쇄를 끊으면 (아라한의) 흐름에 든 자(수다원)라고 한다. 

그중 의심은 불법승 삼보와 인과에 대한 의심이다. 부처님은 법을 깨달으신 분, 법은 곧 무아와 연기법, 연기법은 이 세상의 행복과 불행에 원인을 말한다. 업은 원인이고 행, 불행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과는 다시 현재가 과거의 업에 의해, 미래는 현재 행위에 의해서 결정 지워진다. 그러므로 인과에 의해 발생한 현상들은 스스로의 특성(自性)이 없고 단지 인연에 의해서 형성되어지는 것이며, 이를 무아(無我)라 한다.

이와 같은 고귀한 법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 유지시키는 분들이 바로 승가이다. 이처럼 무아와 연기로 이뤄진 세계와 중생을 바로알고 집착을 끊으신 분인 부처님과 법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승가, 이 3보를 믿고 신뢰하는 것은 불교 신행의 첫걸음이다. 

이 시작점에서 잘못된 흐름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계와 금기에 대한 오해(戒禁取見)이다. 본래 금계는 자이나교의 수행이다. 재가자는 작은 금계, 출가자는 큰 금계의 서원을 세워서 수행을 한다. 그 내용은 각각 5가지인데 “일생을 여자에게서 물건을 받지 않는다, 일생동안 5리 밖을 나가지 않겠다는 등”의 금계에 대한 서원이다. 이들은 이와 같은 고행의 서원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신구의 3업을 정화하지 않고도 다른 방법(예를 들면 계, 진언, 염불, 사마타, 위빠싸나, 화두)만을 통해서도 해탈할 수 있다는 뒤집혀진 믿음 등에 해당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신구의 3업을 8정도를 통해서 정화해야만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개의 족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신견이다.

‘오온이 참나’라는 견해인데, 몸에는 명신과 색신이 있고 이들을 모두 합하면 오온이 된다. 또는 ‘kāya(몸)’안에 영혼이 ‘sat(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오온이 곧 ‘참나’라고 믿는 견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오온은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이와 같은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오온 무아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를 견도(見道) 또는 수다원이라 한다. 

나머지 7가지의 족쇄는 감각적 욕망과 악의, 색계, 무색계에 대한 집착, 아만, 들뜸, 무명이다. 이 7가지 족쇄는 아라한 도에 이르러 끊어지고 이 수행을 수도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상태를 무학위 또는 아라한과라 한다. 이와 같이 3가지 족쇄는 견혹(見惑) 또는 보아서 버려지는 법들이고, 나머지 7개의 족쇄는 수혹(修惑) 또는 닦아야 버려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견혹은 견도에 의해서, 수혹(修惑)은 수도(修道)에 의해 소멸되고,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아라한은 무학(無學이라 한다.(Ps.ii.82) 4성제를 이해한 것을 ‘진리의 앎’이라 하고, 4성제의 수행을 ‘실천의 앎’, 그리고 4성제가 성취된 것 다시 말해서 열반이 실현된 것을 ‘실천되어진 앎’이라 하는데 견도, 수도, 무학위는 이들의 다른 이름이다. (초전법륜경에서 가르치신 4성제의 이해를 견도, 4성제의 수행을 수도, 4성제의 완성을 무학이라 이름한 것이다.) 

[불교신문3501호/2019년7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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