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계도반 금강스님 찾아나선 덕문스님의 ‘덕문현답(德問賢答)’
땅 끝에서 시작…한국불교 중흥에 대해 묻고 답하다

 ‘덕문현답’,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사진 왼쪽)이 지난 6월24일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을 만나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주제로 토론했다. 

지리산 화엄사 산하 화엄선재불교사회연구소(소장 허권)가 한국불교의 좌표를 제시하고, 현대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에 대한 대안을 불교에서 찾고자 찾아가는 토론회를 시작했다.

토론회의 명칭은 덕문현답(德問賢答)’. 화엄종가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이 매달 1회씩 전국의 선지식과 각계 전문가를 직접 찾아가 묻고 답을 구하는 자리이다. 특별히 주제를 정하지 않고 무작위로 묻고 답하는 대화형식의 토론회이다.

지난 624일 첫 선지식으로 땅끝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을 찾았다

덕문스님과 금강스님은 수계도반이다. 올해로 삭발염의한지 35년됐다. 출가자들에게 수계도반은 세속의 깨복장이와 같다. 그러나 계를 받고 각자 수행터로 떠난뒤 지나치듯 몇 차례 만났을 뿐이다토론은 미황사 달마선원에서 가졌다.

수인사를 나누고 덕문스님이 물었다우리가 계를 받을 때는 연 500명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출가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1년에 100명도 어렵다고 합니다. 출가자와 불자 감소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출가자와 불자가 감소하는 주 원인은 인구감소에 있겠지요. 과학이 발달하고 종교없이도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종교가 있어야할 자리에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교현장에서 보면 현대인은 예전보다 훨씬 더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고도성장을 하던 한국사회가 IMF이후 저성장사회가 되면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백양사에서 실직자를 위한 템플스테이를 했습니다. 자살을 생각하던 이들이 템플스테이를 마칠 때 얼굴에 화색이 돌더군요. 그동안 제대로 사람구실을 못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람답게 살겠다고 했습니다.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 의사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찰은 세상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고민을 풀어주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 자리에 명상, 심리치료 등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종교를 원하는 이들은 많은데 불교가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금강스님은 수행자의 도반은 세상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됐다세상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행이고, 이들과 함께 수행하며 살겠다는 원력을 세웠다고 밝혔다.

덕문스님은 이대로 가면 스님들은 살아있는 종교박물관장이 될 것이다스님들이 잘 사는 것만으로도 불자 감소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 강조했다그러면서 덕문스님은 미황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참사람의 향기수행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였다

참사람의 향기는 78일간 진행하는 선수행입니다. 일반적으로 생활이 일주일 주기여서 7일을 넘기면 바깥생활을 포기하게 됩니다. 밖을 포기하면 수행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금강스님이 직접 지도하는 미황사 참사람의 향기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매달 1회씩 진행하는 참사람의 향기 선 수련회가 현재 118차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덧붙여 금강스님은 한국불교의 최고봉으로 간화선()을 꼽았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개인의 고뇌입니다. <반야심경> 첫 머리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보시고 일체고액을 건넌다고 했습니다. 현대인의 고와 액을 극복해주는 핵심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입니다. 어떻게 조견오온개공’ 하느냐가 수행이고 해탈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 수행입니다.”

평소 금강스님은 마을마다 선원만들기 운동을 제안했다. 동네에 요가센터가 있는 것처럼 선원을 열어 참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이가 있다면 집에서 가까운 곳에 선방 열기를 권하고있다. 동네사람들과 함께 시간표를 정해 수시로 참선하기를 권한다. 또한 선방 스님들이 해제 때 마을 선원에 나가 지도해주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

아울러 미황사에서 펼치는 모든 수행 프로그램과 신행활동은 매뉴얼로 정리해 전국 사찰과 신행단체, 스님에게 보급하고 있다.
 

미황사의 수행프로그램을 소개받은 덕문스님은 빠른시일 내에 재가자 안거를 실행하겠다고 밝혔다부산지역 불자들이 안거 때면 모여서 재가안거에 들어간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현재 화엄사는 광주에 포교당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선방을 만들어 재가자들이 선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역 교구본사와 협의해 안거 때면 공동으로 입제와 해제법회를 갖고 틈틈이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수행록을 만들어 수행을 점검토록 해 호남 재가불자 수행의 일대 혁신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덕문스님과 금강스님의 토론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저녁 10시를 넘겨 첫날 토론을 마무리했다이튿날, 아침공양을 마치고 또 다시 달마선원에 앉았다. 달마선원은 멀리 서해안 바다와 섬들을 조망할 수 있는 달마산에서도 명당자리이다.
 

토론의 말머리를 덕문스님이 잡았다미황사는 지정문화재는 적지만 다양한 불교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불교문화의 보고입니다. 미황사에서 진행하는 불교문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89년 폐허나 다름없는 미황사에 오게 됐습니다. 이듬해 설날을 앞두고 마을마다 당제를 지내달라고 하는 거예요. 미황사가 1000년 이상 자리했던 원동력은 마을사람들입니다. 당제를 통해 지역사람들과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에는 지역 주민들을 초청해 경로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별로예요. 먹을거리는 좋은데 무대에서 펼치는 잔치는 쳐다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해부터 어르신들이 주인이 되는 마을대항 노래자랑을 했습니다. 한 달 전부터 마을마다 연습을 하고 참여율이 높아요. 이렇게 미황사는 인근 2개 면소재지 주민들과 항상 소통하고 있습니다.

참사람의 향기 선 수련회와 한문학당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다보니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찾게 되었습니다. 미황사와 인연있는 이들이 모두 모이는 대중법회를 구상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괘불재입니다. 미황사 괘불을 걸어놓고 1년간 농사지은 것을 올립니다. 농사지은 작물은 물론 대학생이 올린 리포트, 영화감독이 올린 DVD, , 가족사진 등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결과물입니다. 어떤 이는 감동있게 읽은 책 10권을 올리고 동참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미황사는 퇴락했던 절이지만 지정문화재가 대웅전, 응진전과 괘불 세 점이 있습니다. 대웅전 천불벽화를 복원모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불교문화 상품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습니다. 괘불은 부분적으로 사진을 찍어 달력, 엽서, 액자 등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땅끝 시골 사찰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문화를 통해 소통하고 감동을 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토론이 진지하면 할수록 찻잔도 부지런하게 오갔다

이후 두 수계 도반 스님들은 탈종교시대 불교의 흐름, 이판과 사판의 경계, 은퇴 출가자, 종단 지도자의 자화상, 중앙종무기관의 조직편제, 미래 한국불교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 등등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토론은 다음날까지 이어졌고 두 스님은 진도 팽목항을 방문하기도 했다.  

포행 시간에 맞춰 덕문스님과 금강스님이 함께 길을 나섰다. 진도 팽목항이다. 국민이 하나되어 세월호 구호활동을 펼친 팽목항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금강스님이 세월호 침몰 당시를 회고했다개인적으로 201411일부터 천일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밖에 나갈 일이 없어 차도 처분했죠. 그런데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것입니다. 급히 지역 스님들과 함께 조계종 긴급재난구호봉사단을 꾸려 230여일 간 활동했습니다. 그때 불자들의 저력을 실감했습니다. 전국의 모든 스님과 불자들이 찾아와 진심으로 세월호 가족을 위로하고 봉사했습니다. 대사회문제에 불교인이 적극적이고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불교구호를 체계화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진도 팽목항에서 토론을 이어가고 있는 덕문스님과 금강스님.
진도 팽목항에서 토론을 이어가고 있는 덕문스님과 금강스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따른다. 배웅길에서 금강스님은 도반 스님에게 종단 소임자로 살다보면 드러내놓고 살아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이다한국불교를 위해 잘 살아달라고 당부했다.

덕문스님도 가장 모범적으로 포교, 수행 잘하는 금강스님이 도반이어서 기쁘다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하나씩 실행하는데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덕문스님은 토론의 출발을 땅끝에서, 함께 수계한 도반으로부터 시작했다. 사진은 차담을 나누고 있는 덕문스님과 금강스님.
덕문스님은 토론의 출발을 땅끝에서, 함께 수계한 도반으로부터 시작했다. 사진은 차담을 나누고 있는 덕문스님과 금강스님.

“잘 살고 계셔서 고맙습니다”

■ 덕문스님과 금강스님은…

1985년 부산 범어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한 수계 도반이다. 두 스님의 출가 시작은 함께였지만 가는 길은 달랐다. 덕문스님은 해인사 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선방수좌가 됐다. 금강스님은 해인사 강원에 들어갔다.

그후 25, 두 스님은 각자의 길에서 일가견을 이루고 다시 만났다. 다른 수계도반들이 만나면 하는 말이 있다. 덕문스님은 선원장이 될 것이고, 금강스님은 총무원의 중요 소임을 맡아 불교혁신을 주도할 것이다. 그런데 수행의 길에서 반전이 있었다.

10여년간 선방에서 중물을 들이던 덕문스님은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부조리를 질타하곤 했다. 지대방에서 불교현황을 비판하며 열을 올리던 어느 날, “선방에서 떠들지 말고 스님이 나가서 직접 고치세요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말만 앞세우기보다 종단 바꾸기에 직접참여키로했다. 마침 호법부가 변해야한다는 여론과 함께 수좌들이 호법부를 꾸리게 됐다. 이렇게 이판에서 사판으로 자리를 옮겨 종단의 중심에 들어갔다.

땅끝 해남 출신인 금강스님은 한국사회에 문제가 있을때마다 함께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광주 원각사 최루탄발사, 6.10 민주항쟁 등의 현장을 지켰다. 1994년 불교개혁때는 중앙승가대 학생회장을 맡아 종단개혁의 선봉에 섰다. 격동의 현장에서 출가를 다시 생각했다. 지켜야할 현장은 지역사찰이었다. 어려서부터 즐겨찾던 해남 미황사에서 수행과 포교로 일관했다.

수계도반 덕문스님과 금강스님이 오랜만에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범어사 행자교육이후 처음이다.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허물까지 모두 꺼냈다. 맞춰보니 고민과 지향하는 길이 같았다. 수계때 초발심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서로 확인하고 웃으며 손을 잡았다.

잘 살고 계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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