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건 우연일까 내 선택일까

나도 4가지 집착이 모여 형성
어리석음은 삼계 윤회의 원인
호기심 좇을수록 괴로움 생겨

 

등현스님

태어남(生, Jāti)은 괴로움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일본과의 갈등, 남북 분단의 괴로움, 중국발 미세 먼지와 강대국 사이에서의 괴로움, 준비 안 된 정치인들이 활동하는 것을 바라보는 괴로움 등을 겪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에 태어난 것이 나의 선택인가, 신의 보내심인가, 아니면 우연일까. 그것은 괴로움의 근원적 책임이 타인에게 있는가, 자신에게 있는가의 책임론적 문제이기도 하다. 연기의 법칙에 의하면 그것은 우연도, 운명적 신의 보내심도 아니고,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것은 한국에 태어나고 싶은 욕구와 업의 선택이다. 

한국에 태어나고 싶은 욕구는 한국이 있는 지구가 있기 때문이고(三有: 욕계, 색계, 무색계), 여러 행성 중에 이 지구를,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을 골라 태어난 것은 4가지 종류에 대한 집착(取, upādāna)의 합이 이곳을 가장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몸(감각 기관)을 편하게 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려는 집착(欲取, kāmupādāna) 스스로 모아놓은 견해와 지식을 지키려고 하는 집착(見取, diṭṭhupādāna) 잘못된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자아를 존중받기 원하는 집착(我取, atta-vādupādāna) 계율 또는 의식을 통해서 만으로도 해탈할 수 있다는 잘못된 집착(戒禁取, sīlabbatupādāna) 등이다. 

이 4가지 취착심 중 오욕락을 취하고 싶은 욕구는 바로 좋았던 느낌을 다시 경험하고 싶은 갈망(渴愛, taṇhā)에 의해서 형성되어진다. 그러면 이 갈망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들은 삶을 살면서 좋고 싫어했던 느낌(受, Vedanā)들이 기억 속에 축적되어서 그것들을 재경험하고 싶은 욕구들이 그러한 목마른 갈망들을 형성한 것이고, 싫어하는 느낌들은 좋아하는 느낌들로 몰입하도록 대상의 초점을 좁혀주는 것이다.

이 느낌들은 감각기관(六根)이 감각기관의 대상(六境)과 접촉함(觸, Phassa)에 의해 발생한다. 또한 감각 접촉은 6가지 감각 기관(六入, Saḷāyatana)이 있으므로 발생하고, 이러한 6가지 감각 기관이 형성된 이유는 지수화풍 4대로 만들어진 부모의 정혈(色)이라는 연(緣)과 한 생명이 일생동안 경험하여 기억한 정보(名, 식수상행)라는 인(因)의 두 가지가 결합되어서 발생한 것이다.

이 두 가지(명색)가 발생한 이유는 바로 한 생명이 죽는 순간의 최후의 식(識, cuti sandhi)이 부모의 화합을 보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어서 선택한 결과인 것이다(三事 和合). 그리고 이 식들의 모임은 신체적인 활동, 언어들의 행위, 생각들(行, Saṅkhārā)을 통해서 발생한 마음에 모인 정보들(識, sense data)이다.

행위들을 통해서 경험지라는 앎이 생기고 그 정보들이 부모의 정혈(色)과 만났을 때, 그 유전자 정보들에 걸맞은 감각 기관들을 정혈을 매개로 발생시킨다. 그 발생한 감각 기관들이 욕망이라는 업들에 의지해서 발생한 세상을 경험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들이 발생하고, 그 느낌들에 의지해서 그 느낌들을 열망하는 취착심(欲取)이 발생하고, 식들의 모임은 지식과 견해들에 대한 집착(見取)으로, 행위들의 모임들은 자아에 대한 집착(我取)으로 발달한다.

이 취착심의 모임들 중에 강하고(우성, 優性) 약한 것들(열성, 劣性)이 있어서 강한 것 들(우성들의 모임)이 바로 금생에 내가 태어날 곳(有)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없는 문제와 고통과 숨 가쁜 업의 과보로 가득 찬 매연속의 삶(生)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교도소에 대한 낭만적 호기심이 있는 한 수행자가 일부러 빵을 하나 훔쳐서 감옥에 들어갔다가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에 빠지는 것과 같다. 이 최초의 잘못된 호기심이 바로 삼계 윤회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그 호기심의 이유는 무엇인가. 오해(無明) 또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즐길 것이, 행복이 있다는 오해, 이 세상은 추구해 볼 만한 아름다운 대상이 있다는 오해, 영원한 것이 있다는 오해, 나라는 것이 있다는 오해, 이 네 가지 오해가 호기심이 발생하게 하고, 행위하게 만든다. 또는 이들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괴로움이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에서 행위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문둥병에 걸린 환자가 환부를 칼로 긁어야 시원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불교신문3497호/2019년6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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