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옷 엮어 입어도 부끄러워 않는 스님이었기에…”

서울 삼각산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가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7년에 세운 왕실 원찰이다. 170여 칸에 이르는 대가람인데다 조선불교의 총본산격인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지정되는 등 억불숭유정책의 시대에도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조선 중기부터 왕실지원이 줄어들고 두 차례의 화재를 입으면서 사세가 기울었다. 하지만 장원심스님이 이곳에서 기도를 통해 비를 내리게 하고, 보살행을 실천했던 것처럼 오늘의 흥천사는 모든 시민의 원찰로 거듭나고 있다.

굶주린 백성 밥 빌어 먹이고 
추우면 옷 벗어 주던 ‘장원삼’ 
벼슬아치에게 굽실대지 않고 
다리 놓고 우물 수리한 ‘자비’ 

도성 쌓을 때 전염병 돌자
일꾼 돌보며 환자치료한 ‘탄선’
온천치료기관 묵사 운영하며
민중치유 힘쓴 ‘천우’ ‘을유’

민가 지붕 개량해 주던 ‘해선’ 
불심ㆍ활불로 불린 ‘해원’ 등
푸대접 받을 때도 중생 보듬은
이들 있었기에 한국불교 존립

<인천보감>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은산(隱山)스님이 영공(靈空)스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사문이 고상한 것은 부처님의 큰 자비 덕분인데, 후세 이렇게 시끄러워진 것은 스스로가 비천하게 굴기 때문입니다. 두셋씩 짝지어 산 속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데, 그 모양이 마치 천태산 바위동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왕공재상들 앞에 가서 꼽추처럼 등을 구부리고 아첨을 하니, 뜻 있는 사람이 보면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자에 와서는 똥불에 산 감자를 구워먹고 살면서 사신이 와도 일어나 인사하지 않았던 옛 선지식의 풍모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명리에 굴하지 않는 수행자 

사신이 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스님이 바로 당나라 때 나잔(懶殘)이다. 나잔은 ‘누더기를 걸치고 노쇠한 노인’이라는 뜻인데, 당시 현종이 그의 덕을 칭송해 관직에 기용하려고 몇 번이나 칙사를 보냈어도 스님은 그 때마다 그 칙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권력과 명예에도 굴하지 않은 수행자로서 영원히 귀감이 되고 있다. 중국불교사나 사찰 기록을 읽다보면, 지나치게 왕권과 밀착된 곳이 많을 뿐만 아니라, 사찰 연혁에도 왕권과의 관계가 무슨 벼슬자리라도 되는 듯 기재되어 있다. 규모가 큰 사찰에는 어김없이 ‘행궁(行宮)’이 있다. 이는 황제가 사찰에 다녀갔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만든 당우이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어떠했겠는가?

조선이 아닌 고려말기부터 불교는 침체일로에 접어들었고, 승려들 활동에 제약이 시작됐다. 1592년 의승군 활동으로 불교계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사실인데, 이를 역이용하는 승려도 있었다. 즉 권력과 사대부에 아부하며, 인정받고자 시문이나 서예를 익힘으로서 승려의 본분을 지키지 않는 자도 있었다. 이때 대표되는 승려가 성지(性智)스님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극소수에 해당한다. 

서산 휴정의 제자인 의엄(義嚴)은 스승의 도총섭 역할을 대신하여 승군 모집이나 군량 보급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 그에게 벼슬을 내리려고 하자, 극구 사양했던 인물이다. 이런 의엄이 1596년 여주 바사산성을 쌓는데 조정에서는 지원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독촉했다. 이때 의엄이 꿋꿋하게 조정에 맞서자, 관리들로부터 ‘방자하게 조정을 업신여긴다’는 말까지 들으면서도 그는 당당했다. 

중생을 먼저 챙기는 스님들

조선불교를 공부하면서 의외의 인물을 많이 만난다. 조선시대 스님들 가운데, 누가 알아주지 않는데도 중생 편에 서 있는 스님들이 많았다. 환희심이 일어날 때가 있다.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천민이나 다름없는 신분으로서 보살행을 실천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았다. 

장원심(長遠心)스님은 가뭄이 심하자 흥천사(서울 돈암동)에 들어가 기도했다. 마침 스님이 기도를 시작하자, 하늘이 움직였다. 기도 이틀 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 가뭄을 해갈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비가 내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과 조정의 신하들은 장원심스님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사실 스님은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저잣거리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굶주린 백성이 있으면 밥을 빌어다 먹이고,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 주었으며, 병든 자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해 구휼했다. 또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주고, 도로를 만들고 교량을 건설하면서 보살행을 실천했다. 사람들이 어떤 옷을 주면 가리지 않고 입었고, 누가 달라고 하면 분별심 없이 주었다. 옷이 없으면 알몸으로 있거나 풀옷을 엮어 입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런 스님이었기에 백성들이 그를 칭송했다. 

태종이 그런 스님을 경계한 이유가 있었다. 비를 내리게 해 준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그에게 관심을 보이면 지금까지 추진했던 숭유억불의 정책이 힘을 잃을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태종은 조용히 황희를 불러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다. 장원심의 자비행이 가상하니 후한 상을 주어 돌려보내라”고 하명했다. 결국 장원심스님이 비를 내리게 한 기도력을 높이 산 것이 아니라 평소 자비행에 대해 치하를 하겠다는 뜻이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1406년 윤7월6일 태종은 장원심스님에게 저포 1필과 정포 25필, 미두 20석 등을 상으로 주었다. 장원심에 대해서는 성현의 <용재총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고, 중생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걸었던 승려’로 전한다. 이후 장원심스님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때문에 스님이 이후 어떤 사찰에서 주석했으며, 언제 입적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음 자비스님을 만나보자. 자비(慈悲)스님은 성질이 곧아 재상이나 벼슬아치를 만나도 굽실대지 않았으며, 어떤 물건이든지 받아서는 남이 달라고 하면 모두 주었다. 또 어떤 물건을 일컬을 때도 ‘돌님’, ‘나무님’, ‘사자님’, ‘토끼님’ 등으로 반드시 ‘님’ 자를 붙였다. <용재총화>의 저자 성현이 자비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산에 들어가 수도하지 않고, 왜 고생스럽게 사람들 속에 살면서 다리나 길, 우물 따위를 수리해주십니까?” “나의 스승이 산에 들어가 10년을 공부하라고 하기에 5년 동안 수행했는데 보람이 없었고, <법화경>을 또 백번 읽으라고 해서 백번 읽었는데 깨달은 바가 없었소. 그래서 승려로서 나라를 도울 길이 없나 고민하다 길과 우물을 수리하고, 다리를 놓아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 조선 초기 탄선(坦宣)스님은 의료행위를 통해 민중을 구제했던 인물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스님은 화엄종 승려로서 서울 도성을 쌓을 때 전염병이 돌자, 성 쌓는 일꾼들을 돌보며 환자들을 치료해주었다. 탄선의 의료사업은 조정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고, 결국 조정에서 1422년 축성 때 도성의 동쪽과 서쪽에 구료소(救療所, 치료소)를 두어 스님이 거느리는 승려 300명과 혜민국(국가의료기관) 소속 위원 60명을 배치해 병자와 부상자를 치료했다. 

다음 세종 때 의술을 행한 천우(天祐), 을유(乙乳)스님은 어떤가. 이들은 선종 승려로서 온천 치료를 통해 민중 의료사업에 힘썼다. 스님들은 1427년 가난한 병자들을 위해 치료해주면서 조정에 이런 청원을 했다. 보(寶, 기름 조성)를 만들어 병자들을 꾸준히 치료해줄 것을 건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승려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예종에서 온천치료사업을 관할토록 했다. 일종의 온천치료기관인 묵사(墨寺)는 한증승(汗蒸僧)이라 불리는 이들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1445년까지 존속됐다는 기록이 전한다. 

해선(海宣)스님은 백성들 집에 기와지붕을 해주었다. 그는 당시 서울의 민가 지붕들이 짚으로 덮여 있어 대외적으로 나라의 위신이 떨어지고, 화재에 취약하다며 기와를 구워 공급했다. 그래서 기와를 구워 팔아 10년 이내에 성안의 민가 지붕을 모두 기와로 덮겠다고 조정에 ‘별요(別窯)’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이렇게 착수해 일을 하면서 조정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모은 쌀 1000석을 호조로 하여금 ‘삼색지보(三色之寶)’라는 기금으로 마련해 민가의 기와지붕을 개량해 주었다. 삼색지보란 쌀값이 쌀 때, 사들였다가 비쌀 때 팔아서 그 이익금으로 기와를 굽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외 승려들은 ‘활인원(活人院)’ ‘귀후소(歸厚所)’ 등 복지기관을 만들어 중생들의 복지에 앞장섰다. 

해원의 보살행ㆍ무소유사상 

함월 해원(涵月海源, 1691˜1770)은 편양파 환성 지안(1664˜1729)의 제자이다. 해원은 화엄사상과 <선문염송>에 정통한 선사이자, 학자였다. 또한 대중교화에 힘썼는데,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널리 베풀었다. 정작 당신 살림이라곤 벽에 걸어놓은 표주박 하나뿐이었다. 법랍 65세, 세납 79세로 안변 석왕사에서 염불을 하면서 입적했다. 대둔사 13대 종사 가운데 제11대 종사이다. 그는 친소(親疎)에 관계없이 병자를 보면 도와주고, 주검을 보면 극락왕생을 빌어주었다. 아무리 값진 물건도 애착이 없어서 옷 없는 자에게는 베풀고, 주린 자에게 밥을 주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해원이 부처님 마음으로 산다고 ‘불심(佛心)스님’, 또는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으로 ‘활불(活佛)’이라고 불렀다. 한편 인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재가자가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이냐?’고 질문하자, 선사는 다음 선시로 답했다. “하루 종일 모든 일 잊고 앉았노라면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네. 내 평생 무슨 살림 있겠나? 벽에 걸린 표주박뿐일세.” 또한 선지식을 찾아 만행중인 제자 월송(月松)에게 이런 선시를 보냈다. “달빛 들어 솔바람 소리는 희고, 달빛 머금은 소나무는 차가워라. 그대에게 지혜의 검 보내노니, 돌아와 달과 소나무 사이에 누우려무나.”

세속적인 명리를 좇지 말고, 담백하게 수행에 힘쓰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 조선의 승려들이 푸대접을 받는 때에도 민중 편에서 중생을 보듬은 승려들, 이들이 있었기에 현 한국불교라 존립하는 것이다. 

[불교신문3483호/2019년4월27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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