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시봉하듯, 도량불사가 곧 수행입니다”

각안스님은 ‘호남 3갑’ 중 한곳인 보성 봉갑사 복원불사를 진행하면서 최장수 송광사 포교국장으로서 전법에도 힘쓰고 있다. 아래 사진은 봉갑사 불사현장에 선 각안스님.

더듬어 보니 20년도 훨씬 넘는다. 취재차 해인사 원당암을 찾았다. 당시 원당암에는 조계종 전 종정 혜암큰스님이 출가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도 제접하고 계셨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수백 명의 불자들이 찾아와 날을 새워 참선수행을 했다. 

원주실을 찾고 보니 꼿꼿하게 수행 잘하는 눈 푸른 납자가 맞이했다. 선방이 아닌 대중의 공부를 후원하는 원주 소임도 수좌와 다름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어느 날, 남도 땅 송광사 템플스테이관에서 그 스님을 만났다. 

전 조계종 종정 혜암스님 시봉
해인사 원당암 불사 원만 회향

삿되고 게으른 수행자 질타한
은사 스님 가르침 올곧게 지켜

‘호남 3갑’ 중 한 곳인 봉갑사
복원불사하며 ‘문화원’도 개원
지역민에게 문화·의료혜택

순천 송광사 ‘최장수 포교국장’ 
15년째 템플스테이 맡아 진행

‘아! 원당암 원주 스님.’ 법명은 기억나지 않는데 원당암 스님의 기운은 처음 그대로였다. 그때 각안(覺眼)이라는 스님의 법명을 알게 됐다. 각안스님의 힘찬 기운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행사 때 자주 만나는 편이지만 아쉽게 수인사만 할 뿐이었다.

벼르고 벼르다 스님의 수행이야기를 듣기 위해 보성 봉갑사를 찾았다. 보성 천봉산 봉갑사는 도량 전체가 불사 현장이다. 호남을 대표하는 ‘3갑(영광 불갑사, 영암 도갑사, 보성 봉갑사)’ 가운데 조선 후기에 맥이 끊긴 봉갑사를 복원하기 때문이다. 봉갑사를 찾은 그날도 스님은 ‘호국원’ 불사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호국원은 단군 이래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선영들을 위한 전각이다. “불사는 외로운 전쟁입니다. 옛 말에 길가 집은 완공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길 옆에 집을 짓다보면 오고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게 되고, 그들의 말에 휘둘려 집을 짓지 못하게 됩니다.” 스님은 ‘도량불사는 길가에 집을 짓는 거와 같다’고 비유한다. 그러면서 “뚜벅뚜벅 앞만 보고 나가야 불사를 이룰 수 있다”고 덧붙인다. 

후학들이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삶을 한마디로 ‘호시우행(虎視牛行)’이라 했다. ‘호랑이의 눈으로 정확하게 보고, 소처럼 뚜벅뚜벅 걸었다.’ 각안스님에게 불사는 출가 초기부터 시작된 수행이다. 스님은 건물 3채뿐인 작은 암자인 원당암을 오늘의 거대한 가람으로 바꾼 주역이기도 하다. “원당암 불사는 은사이신 혜암 큰스님의 공덕입니다. 큰스님이 믿어주시고, 든든한 바람막이를 해주셨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단지 큰스님 시봉 잘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당시 각안스님에게 붙은 별호가 ‘5분 대기조’였고 ‘노가다 십장’이었다. 은사 스님은 하루 한 끼만 드시고(一種食), 등을 땅에 대지 않으며(長坐不臥) 정진했다. 각안스님도 은사 스님을 시봉하기 위해 밤에도 승복과 양말을 벗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낮에는 승복 대신 작업복을 입고 불사 현장을 지켰다. 어른 스님을 시봉하며 불사를 진행하는 것이 ‘큰 공부’였다. 

각안스님에게는 어른 스님 시봉 잘하는 비결이 있다. 평소 혜암스님은 “중이 없으면 소가 없고, 지옥이 빈다”고 했다. 수행자는 게으르거나 삿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려 힘쓸 뿐이다. 

혜암스님이 열반에 들고 고향땅 보성으로 왔다. 또 한 분의 어른 스님을 시봉하기 위해서이다. 이번에는 혈육으로, 아버지이기도 한 도륜스님이다. 세속으로 90세가 넘은 도륜스님은 “공부하는 이에게는 나이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도반이 있을 뿐”이라며 ‘누구나 함께 정진하기’를 강조하는 숨은 도인이다. 

각안스님이 아버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다닐 때였다. 아버지는 스님이셨다. 대흥사로 출가해 염불선을 강조하신 청화스님과 함께 토굴에서 정진하던 수행자이다. 30여 년 전, 도륜스님은 보성 천봉산 자락에 천봉사를 창건했다. 수행자로 잘 살고계시는 아버지 스님을 만나면서 승복입는 것이 좋았다. 각안스님이 출가를 결심한 동기이기도 하다. 

지난 2004년부터 천봉산에서 아버지 스님을 시봉하기 시작했다. 시절인연이 되었는지 천봉산 아래에 주암호가 생기고, 마을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호남 3갑의 하나인 봉갑사 자리가 드러난 것이다.

아버지 스님과 아들 스님은 또 하나의 원력을 세웠다. 1600년 전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나 조선 후기에 맥이 끊긴 봉갑사를 복원하는 불사이다. 스님은 천봉사를 봉갑사로 바꾸고 송광사 말사로 등록했다.

“호남 3갑인 불갑사·도갑사·봉갑사는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거쳐 제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길목에서 삼각축을 형성합니다. 3갑의 도량에서 기운을 모아야 하는데 봉갑이 빠져 기운이 새고 있는 것입니다. 봉갑사가 복원되면 한반도의 기운이 축적되고 나라가 통일될 것입니다.”

천봉산은 봉황이 하늘을 나는 형세이다. 그 모양새가 봉갑사를 향해 날아오는 듯하다. 새롭게 복원하는 봉갑사는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대가람이다. 사격을 크게 잡은 것은 나라를 크게 일으키기 위함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은 지붕이 12각으로 국내에 하나뿐인 전각이다. 보궁 아래에는 5여래 4보살을 모신 대적광전과 140평 규모의 극락보전이 외형을 갖추고 내부와 지붕공사가 진행중이다. 산신각을 비롯해 조사전, 미륵전, 천하제일 호국원도 모습을 점차 갖추어 가고 있다. 절 입구에는 33천을 상징해 거대한 당간지주가 자리했다. 

봉갑사 불사 회향은 기약이 없다. 외부 지원 없이 대부분 스님과 신도들이 직접 힘 닿는대로 하다 보니 끝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각안스님의 일이 도량 불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2005년, 스님은 봉갑사 인근 폐교를 인수해 봉갑문화원을 개원했다. 봉갑문화원은 지역민에게 문화혜택 뿐만 아니라 한의원을 두어 의료혜택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교구본사 포교국장 소임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포교국 특성상 하루에도 수많은 이들을 만난다. 교구와 말사 신도회를 비롯해 포교사단 광주전남지역단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템플스테이는 1년이면 8000명이 넘는 이들이 찾는다. 더구나 이들은 대부분 불교인이 아니다. 타종교인과 외국인에게 살아 숨 쉬는 한국의 전통불교를 체험토록 하고 있다. 모든 일에 부처님 대하듯 하기에 송광사 템플스테이는 인기가 높다. 올해로 5년째 최우수 운영사찰로 선정됐다. 온 몸으로 포교의 최일선을 맡은 결과물이다.

봉갑사를 나서는데 배웅하는 스님의 인사가 내내 귓가에 맴돈다. “매사가 불사 아님이 없습니다. 부처님 모시듯 시봉 잘 할 뿐입니다.” 

■ 각안스님은…

해인사에서 조계종 전 종정 혜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각안스님은 1987년 일타스님 계사로 사미계를, 1990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계를 받고 첫 해 봉암사에서 안거를 난 이후 원당암에서 줄곧 은사 혜암스님을 시봉하며 원당암 중창불사를 이끌었다. 은사 스님 열반 후 2004년부터 보성 봉갑사 복원불사에 진력하고 있다.

스님은 봉갑사 주지와 함께 조계총림 송광사 최장수 포교국장 소임을 맡고 있다. 올해로 15년째 송광사 템플스테이, 수련법회를 이끌고 있다. 또한 조계종 포교사단 광주전남지역단 지도법사,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전문위원 등을 맡아 불교문화와 포교에 힘쓰고 있다. 

[불교신문3483호/2019년4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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