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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22> 임실 성수산 상이암정치 신인 이성계가 왕조 창업할 수 있었던 이유?

‘하늘의 소리 듣는다’ 뜻
왕건 이성계가 기도 올려
왕조 창업 꿈 이룬 도량
‘환희담’‘삼청동’ 碑 보존
지자체 주민들의 자부심

두 왕조의 건국 신화를 간직한 최고의 명당 상이암 모습.

전북 임실 상이암(上耳庵)은 사찰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위(上), 즉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2014년 상이암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 방영되면서다. 드라마 방영 후 2분 다큐멘터리로 상이암이 소개된 뒤 매일 3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다큐로 방영된 이유는 상이암이 두 왕조와 깊은 인연을 지닌 가람이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 염원이 이 절에 담겨 있다. 구전이 아니라 비석에 그 내력이 뚜렷이 남아있다.

대하드라마 소개 후 명성

설 연휴를 앞둔 지난 1일 상이암 가는 길은 눈에 묻혔다. 전 날 내린 눈이 발목 까지 차올라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2시간 넘게 힘겹게 걸은 보람이 있었다. 처음 만난 상이암은 여느 사찰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가파른 입구를 오른 뒤 나타난 경내는 작고 소박했다. 전각은 새로 단장한 듯 깔끔하면서도 오래된 고찰의 창연(蒼然)한 분위기가 묻어났다. 일주문 대신 암벽이 문을 만들고 크고 오래된 화백나무가 손님을 맞이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가람이었다.

이 절의 백미(白眉)는 오른 쪽 바위 산이다. 전각으로 보호한 비석에는 붉은 글씨로 삼청동(三淸洞) 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태조 이성계가 썼다고 한다. 임금의 글씨를 모신 전각이라 해서 어필각(御筆閣)이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태조 이성계가 이 곳을 찾아 백일 기도를 드렸으나 감응이 없자 맑은 계곡물에 목욕재계 하고 3일을 더 기도를 드려 깨침을 얻고 동자승으로 화(化)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 그리고 삼청동(三淸洞) 세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무지개가 하늘로 뻗히며 공중에서 세 번 소리가 들리기를 “이공(李公)은 성수만세를 누리라”했다고 한다. “앞으로 왕이 되리라.”였다는 소리라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이성계는 상이암에서 기도하고 장차 왕이 될 그릇이라는 점지를 받았다.

이성계는 고려 우왕 대인 1380년 황산대첩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돌아가던 길에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곳을 찾았다. 무학대사가 상이암 행을 권유한 이유는 왕건의 건국 설화가 서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선선사가 상이암을 두르고 있는 산을 보고 ‘천자를 맞이할 길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라 탄복하여 왕건을 찾아갔다. 왕건은 도선의 뜻에 따라 계곡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관음의 계시를 얻어 기쁨을 감추지 못해 바위에 ‘환희담’(歡喜潭)이라는 글을 새겼다. 

바위는 공사 중에 발견돼 경내에 서있다. 무량수전 뒤편 작은 바위가 환희담이다. 마모가 심해서 글자를 알아 볼 수 없다. 왕건에 얽힌 이야기는 전국 곳곳에 서려있는 도선설화의 일종으로 보인다. 전남 영암 출신의 도선은 전남 광양에 옥룡사를 창건하고 35년을 주석했다. 주로 지리산 인근에 사찰을 지었다. 상이암도 875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도선이 왕건의 건국을 예견하고 이를 지지하며 전국에 많은 비보사찰을 건설하였으니 상이암과 왕건의 이야기 역시 그 중 하나다. 상이암이라는 이름은 조선 개국 후 각여선사가 지었다.

작고 고색 창연한 암자

이성계의 친필 어필각에 모신 삼청동 비

이성계가 이곳을 찾은 때는 1380년 고려 우왕 대다.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난 후다. 황산대첩은 이성계를 왕으로 가는 길에 놓은 징검다리와 같다. 대마도의 왜구는 수도인 개성 인근 까지 침범할 정도로 고려 후기 국가적 재앙이었다. 몽고와 결별한 후 고려가 북방 방비에 신경을 쓰는 사이 왜구는 고려 남쪽을 제 집 드나들 듯 헤집고 다니며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다. 낙동강을 따라 대구 까지 진출하는가하면 구례 등 지리산 내륙 깊숙한 곳 까지 침범했다. 개성 코 앞 강화도 까지 점령당하고 해로를 통한 운송이 막혔다. 

고려 우왕 대에만 200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고려는 군사력을 총동원했지만 곳곳에서 창궐하는 왜구를 격퇴하지 못해 쩔쩔 맸다.절은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작은 전각을 배치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절 주변은 온통 산이다. 입구 까지 오기 전에는 암자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챌 수 없다. 상이암을 둘러싼 산 이름이 성수산(聖壽山)이다. 하늘의 소리를 내린, 두 번에 걸쳐 왕국을 세운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이다. 

‘삼청동’ 글씨를 새긴 바위 이름이 향로봉이다. 풍수가들은 아홉 마리의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구룡쟁주(九龍爭珠) 형의 여의주에 해당하는 천하명당이라고 찬탄한다. 절 주변 아홉 능선에서 뻗은 정기가 이 곳 향로봉에 집결한다고 하니 예사 길지(吉地)가 아니다. 고려 조선 두 번의 왕조를 세운 사찰에 걸 맞는 형세다. 본전인 무량수전 앞 화백 나무 아래 작은 연못이 절 운치를 더한다. 무량수전 뒤 환희담 위로 칠성각이 있고 그 위로 부도가 나온다. 

부도 밭 뒤 오솔길을 ‘왕의 기도길’이라 부른다. 상이암은 임실 최고의 보물이다. 술에 취해 잠든 주인을 구한 오수의 개와 1960년대 벨기에 신부가 농민들 소득 증대 차원에서 시작한 치즈, 필봉농악이 대표하는 임실에서 이성계, 왕건 두 태조가 인연 맺은 상이암은 최고의 자랑거리다. 상이암 가는 길에는 ‘왕의 길’ 조성 공사가 한창이고, 군은 절 주변 정비에 발 벗고 나섰다.

황산대첩 대승 이끈 이성계

주로 북방에서 활약하던 이성계도 왜구 격퇴에 나섰다. 이성계는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고려 최고의 장수였다. 공민왕 대인 1361년 박의가 일으킨 난을 진압한 것을 비롯, 홍건적에 함락된 개경 탈환, 원의 장수 나하치 격퇴, 1377년 지리산 왜구 격퇴, 해풍 전투 승리 등 이성계가 몸소 출전하여 승리한 전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명성은 장군과 군인들에게 파다했다. 그러나 귀화한 여진족 출신이라는 신분상 한계로 인해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중앙무대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그러던 이성계의 운명을 바꿀 결정적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운봉 일대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이다. 황산대첩은 대마도 왜구와 고려의 명운이 걸린 전투였다. 서남 해안과 동해 방면에서 각기 싸우던 왜구들은 연합세력을 구축하고 지리산으로 집결했다. 이들은 구례에서 상주 까지 자유자재로 드나들 정도로 세력이 강했지만 북방 방비에서 왜구 격퇴로 전략을 바꾼 고려의 강력한 토벌 정책에 의해 세가 위축됐다. 왜구는 연합세력을 구축해 빼앗긴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지리산의 운봉에 진을 치고 고려군과 맞섰다.

이성계는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 문하찬성사’라는 직책이 그의 어깨에 얹혔다. 이전 까지 이성계는 최영 휘하 장수로 출전했다. 많은 공을 세우고도 이름을 날리지 못한 것도 최영이 이끄는 부하 장수였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고려와 왜구가 명운을 걸고 일전을 겨루는 전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출전했다. 전황은 고려군에 불리했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높은 산 위에 진을 친 군영에다 전투로 단련된 왜구들의 거센 저항을 뚫기가 만만치 않았다. 왜구에는 아기발도(阿基拔都)라는 맹장도 있었다. 이성계 조차 감탄해서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용모가 준수하고 용맹이 뛰어난 소년 장수 아기발도가 나타나면 고려군은 허둥지둥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온몸에 갑주를 착용하고 중무장을 하여 불사신(不死身)으로 불리는 아기발도였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돌진하는 명사수(名射手) 이성계의 화살은 비켜가지 못했다. 

아기발도가 쓰러지자 왜구는 더 이상 저항을 의지를 상실한 채 무너지고 고려군은 승리했다. 왜구의 시체가 언덕을 이루고 그 피가 내로 흘러들어 7일간이나 물빛에 핏기가 가시지 않았다. 고려군은 말 1600여 필과 다량의 병기를 확보하는 전과를 올렸고 왜구는 겨우 70여명이 목숨을 건져 달아날 정도로 궤멸됐다. 이 전투로 인해 오랫동안 고려를 괴롭혔던 왜구는 동해안 일원에서 간간히 소규모로 노략질 하는 수준으로 세가 크게 약화됐다. 고려도 왜구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황을 딛고 맨 앞에서 몸을 던져 승리로 이끈 이성계는 백성들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많은 장수들이 왜구와 직접 전투를 꺼리고 주로 중앙에서 정치에 몰두하던 것과 달리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며 선두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이성계는 독보적 존재였다. 백성들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이 그의 곁에 모였다. 

이성계 못지않게 뛰어난 장수였지만 정치에 때 묻은 최영과 달리 그는 참신했다. 망해가는 고려를 개혁하려는 야심찬 유학자들이 최영 대신 이성계를 찾았다. 이색 정몽주 정도전이 바로 그들이다. 몸을 사리지 않고 전장에 뛰어들어 혁혁한 공을 세우는 ‘참 군인’ 이성계를 최영도 대환영했다. 백성들의 지지와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지원, 중앙 무대 최고 권력자 최영의 후원 까지, 황산대첩은 이성계에게 하늘을 얻을 기회를 선물했다.

전쟁 승리 12년 뒤 왕조 세워

황산대첩 승리 12년 뒤 이성계는 왕조를 창업했다.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다 해도 중앙 정치 경험도 배경도 없는 군인이 승리의 깃발을 올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정치인의 불쏘시개로 사라지거나 마음만 급한 젊은 개혁가들의 부추김에 희생양으로 무너지는 사례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성계는 단 한 번의 좌절이나 실패 없이 승승장구를 거듭해 결국 승리했다. 어쩌면 전장에서 승리 뒤 곧장 개성으로 가지 않고 상이암에서 기도했던 수행이 그를 왕조 창업으로 이끈 힘은 아닐 까?

백일도 모자라 3일을 더 기도드린 끝에 그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이성계가 삼청동(三淸洞) 세 글자로 나타낸 그 소리는 불교의 진리다. 몸(身) 입(口) 생각(意) 으로 짓는, 인간의 행(行) 이 번뇌의 근본이요 번뇌를 소멸하는 길 역시 그 세 가지를 청정하는데 있다는 것이 불교 진리의 핵심이다. 깨끗함이란 더러움의 반대가 아니라 욕심내서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물 흐르듯 순리를 따르는 ‘본래의 성품’을 뜻한다. 

이성계는 고려 정계의 스타로 떠올라 정치인 지식인 군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지만 들뜨지 않았으며, 반대편도 끌어안고 참모들의 말을 새겨들었다. 낮은 자세와 경청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도인(道人)의 풍모를 보였다. 상이암에서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개경으로 갔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 까? 강한 군대를 거느린 위세를 믿고 서두르다 비극적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

고려 왕건의 이야기가 담긴 환희담 비.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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