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맞대고 앉은 점심식탁에서 
서툰 젓가락질로 짜장면을 
얼굴에 붙이며 먹는 손주를 보자 
내 얼굴이 화끈하고 가슴이 짠했다 

내 몸 아끼자고 설날 중국집이라니
피곤할테니 어서 가라는 내 말에 
어린 손주가 두발을 뻗고 울어댔다… 

겨울 내내 잠잠하던 농수로에서 들리는 조잘거림은 투명한 얼음장 밑에서 고개를 내미는 은빛 물결들의 환호였다. 마침 떼 지어 날아가는 까치들, 나무들 사이로 숨어드는 바람소리까지 봄의 메아리는 천지에 울려 퍼지는 교향악이 분명했다. 순간 내 아이들에게도 봄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다.

설날 왔다가 하룻밤 자고 가자고 보채는 손주를 등 떠밀어 보낸 게 마음에 걸렸다. 마음에 걸린 게 어디 그 뿐인가? 큰아들이 설 연휴라며 이틀만 쉬고 설 전날 밤에 오겠다는 말에, 요즘은 식당에서도 설날 모임을 돌잔치나 생일잔치처럼 한다는데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다. 아들은 우리도 그렇게 하자며, 몇 시에 가면 되느냐고 물었고, 나는 새벽같이 올 필요 없으니 아침 먹고 점심시간에 맞춰 오라고 했다. 그럴게요, 라는 아들 목소리가 명쾌했는데도 그때부터 괜히 심란했다. 

실은 한두 달 전부터 오른쪽 팔이 아파서 병원엘 갔더니 목 디스크라고, 무거운 것도 들지 말고 좀 쉬라는 의사 말 때문인지 몸 쓰는 일이 귀찮아졌다. 마침 친구네도 양력설에 식당에서 모였더니 너무 좋더라는 말에 나도 용기를 냈지만 한쪽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랜만에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너무 한다 싶어 설 전날 저녁에야 후다닥 강화읍으로 나갔다. 그러나 시골이라 그런지 마트며 떡집은 물론 작은 상점들도 문을 닫았다. 빈손으로 돌아와 냉장고까지 텅 비어있는 걸 보니 가슴이 선듯했다. 잠자리에 들었으나 정신은 점점 더 맑아져 결국 거실로 나와 괜히 어슬렁거리다 구석에 걸린 모네그림 ‘수련’ 앞에 섰다. 

내가 모네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문득 자식과 부모야말로 공존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괴감 때문인 것 같아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마음 탓인지 ‘수련’이 먹물에 젖어있는 것 같아 다시 그림을 보다가 엉뚱한 발상으로 흘렀다. 어떤 그림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고, 중학교 때나 배운 이치를 이제야 깨달은 듯, 하물며 사람 사는 일이야 더 다를 수밖에. 

시대의 변천을 무시하다니, 나는 흥분하면서 명절날 인천국제공항에 몰리는 인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아느냐고? 큰소리 치다가 설날이 별 날인가, 라는 말에서는 풀이 죽어 혼자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날이 무슨 벼슬하는 날도 아닌데, 어차피 며느리 교회 다닌다고 제사상도 물린 마당에, 핑계거리가 많다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앉은 점심식탁에서 서툰 젓가락질로 짜장면을 얼굴에 붙이며 먹는 손주를 보자 내 얼굴이 화끈하고 가슴이 짠했다. 내 몸 아끼자고 설날에 중국집이라니, 이런 어미가 무슨 자격이 있는가 싶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피곤할 테니 어서들 가라는 내 말에 어린 주화가 두발을 뻗고 울어댔다. 아들은 잘 됐다 싶은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는 손주를 얼른 등에 업어서까지 차에 태워주며 밀어냈던 것이다.

가족이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삶의 현실인데, 요즘 들어 자주 잊어먹고 딴전을 부리는 게 아무래도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부담스러웠던 같다. 70, 이제는 ‘나홀로’ 느끼는 텅 빈 공간의 그 가득한 여운을 사랑하고 다독이며 살 나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날이었다.

바람이 산들거리며 지나간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몄던 것이 엊그제였는데 지금 내 얼굴에 스치는 바람은 나를 미소 짓게 해준다. 

[불교신문3468호/2019년3월6일자]

안혜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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