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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두의 고승전] <34> 학월 경산대종사“총무원장 시절에도 육환장 짚고 시내버스에 탑승…”

 

“계율은 우리 종단의 초석
불퇴전 각오로 계율 지켜야
교단의 영구적 생명 유지돼”

군승제도 기초 1968년 시행
종비생 추진…역경원 개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성취
한국불교·종단 발전 ‘헌신’

“출가자 본분은 수행하는 것
큰 절 차지하는데 있지 않다” 
총무원장 세 차례 역임에도
문도들 교구본사 하나 없어

“계율 지키는 것이 곧 성불이요 중생구제”라며 대중을 지도했던 경산스님은 한평생 묵묵히 한국불교의 중흥과 종단 화합을 위해 헌신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학월당(鶴月堂) 경산대종사(京山大宗師: 1917~1979)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인생의 진로를 찾고 싶어 출가하여 수행과 함께 한국불교의 정화(淨化)와 중흥, 종단의 화합과 안정이라는 과제를 화두로 삼아 한 생을 살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대와 제9대 총무원장,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종비생 제도와 군승제도를 확립했다. 1975년 9대 총무원장 시절 불교계 숙원이던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성취했다. 평소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를 주요 가르침으로 대중을 교화했다. 

“불법(佛法)은 승가의 화합 속에서만 꽃을 피우고 또 중생의 괴로움을 건질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스스로가 명심하여 실천할 때 일초일목(一草一木) 일물일생(一物一生)이 모두가 그 영원한 업보에서 해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로 화합하는 것, 이것은 곧 나의 작은 고집과 상(相)을 덜어버리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진리가 곧 우리들 수도인의 본분임을 명심합시다.” “수도하는 종단이라는 사회의 평가가 내려지지 않는 한 우리들은 계속하여 자율적인 역량을 무시당하게 되는 슬픔을 어쩔 수 없이 맛볼 것입니다.” 

“계율은 우리 종단의 초석입니다. 교단의 영구적 생명은 계율이 살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승단의 기본질서와 수도의 참다운 길은 부처님의 계율을 엄정히 지켜나가는 데서 유지되고 찾아집니다. 계율이 깨끗하지 못한 승려에게 오늘날 신도들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리 없고 또한 부처님의 은혜가 있을 리 없습니다. 차라니 목숨을 끊을진대 계는 범하지 않겠다는 불퇴전(不退轉)의 각오가 서지 않는다면 승가에 몸을 의지하여 불도의 진리를 닦는다고 말 할 것이 없습니다. 계를 바로 가집시다. 육바라밀의 지계(持戒)는 바로 우리들의 생명임을 다시 한번 다짐합시다. 그리하여 참된 종단의 정화를 이룩합시다.”

“사찰은 진리로 한 집단이 된 청정대중이 수도와 전법으로 생애를 마칠 곳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도량(道場)을 물량시하는 풍조는 단호히 배격합니다. 보다 심화되고 승화된 내면의 세계를 우리는 가장 중시(重視)합니다. 정신세계의 요람을 관광물시 하거나 기업화하려 잘못된 견해가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설득시키고 이해시켜 자율적인 승규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귀중한 유산을 방대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부당국에서도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선조들의 얼이 담긴 성보(聖寶)문화재를 우리 스스로 잘 보존하고 지켜갈 때 정부에서도 선의의 협력과 원조가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선의의 보시는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고 있는 반면 자주와 자율성은 공고히 지켜갈 결의가 굳음을 강조합니다.”(1973.2.1. 총무원장 담화문 중에서 발췌) 

청정율사 경산스님 수행이력

경산스님은 1917년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황수원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손봉준(孫鳳俊), 모친은 이(李)씨다. 속가의 이름은 희진(喜璡)이다. 1936년 금강산 유점사로 입산, 출가하여 홍수암(洪秀庵)스님을 은사로, 해운(海雲)스님을 계사로 수계했다. 법명을 경산(慶山)이라 했다. (1975년 이후 京山으로 바뀜) 

1940년 유점사 불교전문 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하안거를 났다. 1941년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스님을 모시고 하안거를, 1942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석우스님을 모시고 안거하고 1943년에는 영축산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경봉스님을 모시고 안거했으며 1944년에는 오대산 상원사 한암스님 회상에서 안거 정진했다. 1944~1946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안거하고 남으로 내려온 스님은 1946~1950년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경봉스님을 모시고 정진했다. 경산스님은 약 4년 간 극락선원에 머물면서 참선수행에 몰두하여 경봉스님에게서 법을 인가받고 법제자가 되었다. 

1950~53년 금정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모시고 정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53년 통영 미래사 도솔암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던 스님은 1954년 정화가 시작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1955년 효봉 청담 인곡 월하스님과 함께 불교대책정화위원회(문교부 중재로 구성)의 비구측 대표로 활동했으며 비구승으로 구성된 최초의 조계종에서 중앙종회 의원에 선출됐다. 

1956~58년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 교무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 1959년 서울 적조암(성북구 돈암동)에 주석. 1960년 조계종 비구 측 비상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됨. 1961~62년 통합종단 전 조계종 제6대 총무원장 역임.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하면서 제1대 중앙종회 차석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구례 화엄사 주지를 역임했다. 1963~64년 총무원 교무부장(63년) 건봉사 주지(63년) 총무부장(64년)을 역임했다. 

1963~67년 동국대 제18대 이사장을 역임한 스님은 종비생 제도를 발의, 추진하고(63년) 동국대에 역경원을 개설하고(64년) 군승제도를 추진(68년에 시행), 1965년 대한불교화동위원회의 조계종단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66~67년 조계종 제3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1968~72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수행. 1972~73년 동화사 주지, 1973~75년 조계종 제9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1975년 1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성취했다. 

1978~79년 숭산스님이 설립한 미국 달마사 조실 역임. 1979년 통합종단 출범 후 세 번째 총무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해 12월 법문집 <삼천전심(三處傳心)>이 출간됐다. 같은 해 12월25일(음력11월7일) 총무원장 취임 약 한 달만에 종무회의 중 입적했다. 과로로 인한 뇌출혈이 원인이었다. 12월29일 조계사에서 종단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다. 법랍44세, 세수63세. 스님 입적 후 적조암에 스님의 사리탑비와 부도탑이 세워졌다. 탑비의 비문은 탄허스님이 짓고 썼다.(1983년) 2018년 11월 경산스님일대기 <청정율사 경산스님의 삶과 가르침>이 발간됐다.(박원자 지음. 동국대출판부) 

벽시계 하나 없는 적조암에 머물러

경산스님은 종단의 수장인 총무원장을 지내면서도 벽시계 하나 없는 적조암에 머물렀다. 흔히들 좋은 절이라 말하는 데는 다른 사람을 보냈다. 총무원장 시절 급한 용무를 볼 때를 제외하고는 늘 시내버스를 타고 총무원에 출근했고 먼데를 갈 때도 시외버스를 이용했다. 육환장을 짚고 버스에 올라타면 차내 모든 사람이 쳐다보곤 했지만 스님은 이런 시선들을 개의치 않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관청에 들어가 일을 보는 스님을 보고 재일동포 신도 한사람이 검은 색 지프차 한 대를 기증했다. 스님은 ‘수행자가 이걸 타야하나 사치스런 일이다’라며 돌려보냈다. 스님은 1959년 적조암에 주석하여 입적할 때까지 근 20년을 이곳에 살았다. 공양주 소임을 보고 있는 상좌가 연탄불에 음식을 조리하느라 때로는 공양시간을 맞추지 못했지만 석유곤로를 들여 놓을 엄두도 못 낼만큼 살림살이가 어려웠다. 

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을 지낸 스님이 입적한 때 남은 것은 적조암 뿐이었다. 스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좋은 절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말라며 어떤 절에도 임명하지 않았다. 

“내가 종단에 있는 동안 본사를 맡을 생각을 하지 말거라. 이 몸도 다 버리고 가는데 무엇을 탐할 것이 있겠는가. 다 무상한 것이다.” “깨치지 못하면 모두 소용없다. 마음을 깨달아서 구경(究竟)의 도리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가 수행자다. 돈을 탐하고 절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수행자의 정신에 어긋난다.”

이런 은사이었기에 경산스님 권속들은 스님 생전 본사는 말할 것 없고 말사하나 배정받지 못했다. 총무원장을 세 차례나 역임하는 등 종단의 핵심에 있었지만 끝내 교구본사를 문중 사찰로 만들지 않은 경산스님. 제자들이 “스님께서 노년에 머무실만한 교구본사가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문도들도 교구본사를 맡고 있어야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했지만 스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출가자의 본분은 수행하는 것이지 큰 절을 차지하는데 있지 않다. 더구나 총무원장을 지낸 내가 교구본사를 문중절로 만들면 남들이 크게 웃을 일이다.” “수행자의 목적은 오로지 선과 교와 율을 익혀 성불하는데 있는 것이다.”

■ 자     료 : 청정율사 경산스님의 삶과 가르침(박원자 지음, 동국대 출판부) 
                   학월경산대종사 사리탑 비문(한국고승비문총집-조선조근현대 지관編)

[불교신문3467호/2019년3월2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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