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사제…“한 생각으로 회광(回光)하면 보리(菩提)의 바른 길”

세종과 세조는 정책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호불적이었다. 배불정책 속에서도 대왕의 호불적인 면이 있었기에 행적이 전하는 고승들이 있다. 묘각국사(妙覺王師) 수미(守眉)는 선(禪)에 뜻을 두어 구곡 각운을 찾아 도를 구했으며, 벽계 정심의 제자가 됐다. 수미는 세조 때, 왕사로 책봉되었으며 영암 도갑사(도선국사의 도량)를 중창 불사했다.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1403˜1480)는 세종의 충신인 김수온의 친형으로 한글창제의 주역이다. 설잠 김시습(1435˜1493)은 생육신 가운데 한분으로, 단종의 하야를 계기로 출가했다. 이렇게 척박한 시기에도 뜻있는 승려들이 배출됐다. 

그러나 세조 이후 승려들의 지위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도 선사들의 법맥은 이어졌다. 벽송 지엄에게서 기라성 같은 선지식이 두 분 배출된다. 부용 영관과 경성 일선이다. 

조선초 배불정책 속에서도 선(禪)에 뜻을 두어 부처님의 혜명을 전하는 데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한 선사들이 있다. ‘연선도인’으로도 불린 부용영관. 문화재청 제공

‘은암선자’ 부용 영관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은 진주 출생이다. 아버지는 원연(袁演)이고, 스님의 속명은 구언, 법명은 영관, 당호는 부용이다. ‘부용’이란 연꽃을 말하는데 몸은 비록 세속에 머물러 있지만, 마음은 항상 서방정토에 가 있기 때문에 부용이라는 호를 썼다. 영관은 스스로 은암선자(隱庵禪子) 또는 연선도인(蓮船道人)이라고 했다.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미천하고 어려운 가정으로,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영관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아버지가 고기를 잡아 바구니에 담으면 스님은 몰래 물에 놓아주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종아리를 때리자 스님이 울면서 말했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목숨을 아끼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물고기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것 같아 그런 것이니, 용서해주십시오.”

스님은 어릴 적 소꿉놀이를 할 때도 돌멩이를 세워놓고 그 앞에 부처님께 공양올린다고 하면서 모래로 공양 올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느 스님이 영관의 부모에게 “이 아이는 세상에 묻혀 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13세 되던 1498년 영관은 집을 나왔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 

스님은 길을 재촉하여 지리산 화개동으로 들어가 고행선자(苦行禪子) 문하에서 3년 동안 행자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았다. 17세(1501, 연산군 7년)의 영관은 신총에게서 경전을 배우고, 위봉에게 선지(禪旨)를 공부했다. 이후 영관은 덕유산 무주구천동으로 들어가 토굴에서 9년 동안 용맹정진했다. 24세(1509, 중종6년)에 영관은 경기도 용문산 조우대사를 만나서 경전과 노장사상을 배운 뒤, 29세에 청평산 학매대사를 찾아가 공부했다. 이후 영관은 경을 강의할 때는 마치 파도치는 물결처럼 변재가 훌륭했고, 선지를 논할 때도 깊이가 매우 뛰어났다. 다시 금강산 대존암을 거쳐, 미륵봉 내원암에서 9년 동안 면벽 좌선했다. 영관은 9년간 묵언했는데, 사람들이 뭔가 물으면 손수 써서 벽에 붙여놓은 시를 가리키곤 했다. 

이렇게 공부가 무르익은 영관은 46세 무렵, 9년간의 묵언을 트고 나서 문득 고향 부모님이 생각났다.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진주 삼천포 땅에 들어섰다. 문득 한 노인이 소를 몰고 오고 있었다. 영관은 노인에게 물었다. “여기가 진주입니까?” 노인은 진주 땅에서 ‘진주냐?’고 묻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답했다. “그렇소만, 이곳이 바로 진주 땅이오?” “여기는 제 고향입니다. 아버님의 함자는 원(袁) 자, 연(演) 자이시고 저의 아명은 구언입니다. 혹시 모르십니까?” 

 


만년 정토 발원…선정일치 ‘영관’
천문ㆍ의술, 유학도 조예 깊어 
삼남지방 선비들 찾아와 공부

지엄의 임제선풍 지향한 ‘일선’
제자들에게 늘 활구참선 강조
전국 선자 몰려 ‘절상회’ 이뤄

노인은 소고삐를 떨구며 스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내가 죽지 않고 산 보람이 있었구나. 오늘에야 너를 만났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너의 애비다. 네가 집을 나간 지 30여 년, 아무리 알아봐도 알 길이 없어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죽지 않고 기다렸단다. 너의 어머니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튿날 영관은 부친을 하직하고 지리산 화개골의 벽송 지엄을 찾아갔다. 지엄 앞에 당도해 예배하고 말했다. “영관이 멀리서 스님의 법풍을 흠모하여 멀리서 찾아왔으니 섭수해 주소서.” “영(靈)도 감히 올 수 없거늘 관(觀)이 어디서 왔단 말인가(靈且不敢 觀從何來)?” “청컨대, 스님께서 감찰(鑑察)하소서.” “조탁(彫琢)할만 하구나.”

영관은 지엄 문하에 머물며 참구하여 20년 동안 품었던 의심이 풀렸다. 영관은 지엄의 법을 받고, 곁에 머문 지 3년 만에 지엄은 열반에 들었다. 영관은 스승이 열반한 후에도 지리산에 머물면서 학도들을 가르쳤다. 스님의 성품은 온화하고 자비로웠으며, 식량이 부족할지라도 대중과 똑같이 공양했다. 영관은 의리(義理)에 뛰어나 천문이나 의술에까지 통달했으며, 유교와 장자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삼남지방의 선비들이 스님을 찾아와 공부했다. 

이후 영관은 황룡산, 팔공산(전북 장수)을 거쳐 말년에는 지리산 쌍계사, 대승암, 연곡사, 의신암 등지에서 살다가 1571년 의신암에서 입적했다. 세수 87세, 법랍 74세이다. 전법 제자로는 서산 휴정과 부휴 선수 등이다.

문인들이 모신 ‘경성당’ 일선 

경성 일선(敬聖一禪, 1488˜1568)은 서산대사의 사숙으로 휴정이 일선의 행장을 찬술했다. 일선의 성은 장(張) 씨, 울산 출신으로, 호가 휴옹, 선화자, 경성, 광성이다. 일선의 모친이 명주(明珠)를 삼키는 태몽을 꾸고 낳았다. 일선은 어려서부터 마늘이나 파, 고기를 싫어했고 불교 놀이를 좋아했다.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3년 동안 몹시 슬피 울다가 무상함을 느끼고 13세에 단석산 해산(海山)에게 의지했다가 16세(1503년, 연산군 9년)에 승려가 됐다. 23세의 일선은 묘향산 문수암에서 고행 정진하다가, 지리산 벽송사의 지엄을 찾아갔다. 지엄으로부터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참구하라”는 지도를 받아 활구(活句)를 깊이 참구한 뒤에 깨달음을 얻고 지엄에게서 법맥을 받았다. 

이후 금강산 시왕동에서 좌선하다가 2차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부터 간화선의 경절문(經截門) 언구를 사용했다. 그 뒤 표훈사의 승당에서 한 해를 보내고 상원암에서 2년의 안거를 성만했다. 1536년 나라에서 승려들에게 신천(新川)의 제방을 쌓게 했는데, 50세였던 일선은 그 부근을 표연히 걸어갔다. 일선의 의연하고 걸림 없는 모습에 감독관이 스님을 세우고, 대화를 나누었다. 감독관은 스님의 물외도인적인 풍모에 감탄해 스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서 보름간 유숙케 하며 법을 물었다. 이런 동안 주위에서 스님을 친견코자 찾아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를 염려한 어느 유생이 사헌부에 “경성당이라는 중이 혹세무민하니 빨리 잡아가라”는 투서를 올렸다. 스님은 의금부에 갇혔는데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의연히 가부좌를 한 채 평상시와 다름없이 정진했다. 관리들은 일선의 모습에 죄가 없다고 판단하고 스님을 방면했다. 

이후 일선은 묘향산(西山)에서 9년 동안 은거하다가 1544년에 보현사 관음전에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이때 문인들이 당을 세우고 경성당이라고 했다. 80세의 일선은 제자들에게 이런 당부를 내렸다. “모든 인자(仁者)들은 정념(正念)을 가지며, 어떤 것에도 애착을 품지 말고, 또한 세속을 따라 쓸데없이 일을 떠벌이지 말라.” 

그런 뒤 일선은 “80년 삶이 허공의 꽃이요, 지난 일들은 여전히 눈앞의 꽃이로다. 다리 끝이 문을 넘기 전에 본국에 돌아왔으니 옛 동산의 복숭아꽃은 이미 활짝 피었도다”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일선은 자신의 시체를 새와 짐승에게 먹이라는 말씀을 남긴 뒤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제자로는 의웅, 의변, 선등, 일정, 성준 등이 있다.

‘사형사제’ 한국불교사적 위치 

도갑사의 ‘수미왕사비각’.

첫째, 오염된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척박한 환경에서도 올곧은 수행자가 배출됐다는 점이다. 영관과 일선은 사형사제로, 두 분의 행적에서 보았듯이 조선 땅 곳곳 요소에 많은 수행자들이 의연한 모습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영관의 당호가 부용(芙蓉)으로 선사는 만년에 정토를 발원한 선정일치(禪淨一致) 선풍으로 추론된다. 물론 고려 말기 나옹혜근에게서도 드러나 있고, 제자 서산에게서 정토사상이 드러나 있는데, 조선 선종사에 선정일치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 일선은 당시 묘향산에서 선풍을 펼칠 때, 전국에서 선자들이 몰려와 조선의 절상회(折床會)를 이뤘다. 일선의 선풍은 지엄의 임제선이며, 간화선적 활구 참선을 강조했었다는 점이다. 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했다. “활구(活句)를 참할 것을 간절히 당부한다. 한 생각으로 회광(回光)하면 보리(菩提)의 바른 길이다.” 

그런데 일선에게는 아쉬운 점이 남는다. 후대까지 그의 법맥이 전하지 않는다. 필자가 순례한 선찰 조사전에서 일선의 진영은 한 번도 뵙지 못했다.(일반적으로 법맥으로 선사의 진영을 모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선은 휴정의 삼로(三老, 지엄·영관·일선)의 한분으로 존경받았고, 후손들의 마음속에 위대한 선지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불교신문3465호/2019년2월23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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