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믿거든 철저하게 믿어야 한다”

신라 이차돈이 죽음으로서
불교가 나라에 복이 되고
백성에게 이가 되느냐
시험했으니 의심할 것 없다

격동의 세월에도 수행에 몰두하고, 평생 대중들에게 지남(指南)을 보여 준 경봉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의 큰 족적을 남겼다.

법좌(法座)에 올라 주장자(杖子)를 세 번 치고 이르시기를 진리(眞理)는 무언(無言)이라. 참된 이치(理致)는 말이 없고 목격이도존(目擊而道存)이라. 눈을 내지르는데 도(道)가 있고 성전미어전(聲前眉語傳)이라. 소리 전에 눈썹 말이 전해. 눈만 끔쩍하고 손만 들어도 알아야 된다. 

청과조합(靑果組合)에 가보면 어디 말을 하느냐? 손만 내 저으면 그만 값이 나온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부처님 말씀을 전(傳)하겠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널리 일체(一切) 중생(衆生)을 관(觀)해보니 일체 중생이 여래(如來)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하고 또 일체 중생의 종종환화(種種幻化)가 다 부처님의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니 이 마음을 여윈 밖에 불(佛)을 가히 이룰 수가 없다. 우리의 소소령령(昭昭靈靈)한 이 자리는 언어문자가 다 떨어 졌는데 말을 하자고 하니까 경전(經典)에 혹은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리(性理)라고도 하고 영(靈)이라고도 하고 일착자(一着子)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말이 있으나 그것은 부득이 해서 말하는 것이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物件)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 과거(過去) 제불(諸佛)도 다만 이 마음 밝힌 사람이요, 현재(現在) 모든 현성(賢聖)도 또한 이 마음 닦은 사람이요, 미래(未來)에 닦고 배울 사람도 마땅히 이 법(法)을 의지해서 우리가 수행(修行)해야 된다. 

원(願)컨대 모든 수도(修道)하는 사람은 간절히 마음 밖에 구(求)하지 말 것이니 심성(心性)이 물듦이 없고 본래(本來) 원성(圓成)해서 다만 망령(妄靈)된 인연(因緣)만 여의면 곧 여여(如如)한 부처이니라. 

그래서 이것이 경전 가운데 있는 요긴한 한 구절(句節)을 말했다. 

그리고 불교를 믿거든 철저하게 믿어야 된다. 

옛날 중국에는 불교(佛敎) 도교(道敎) 유교(儒敎) 등 각 종교가 있어서 내 종교를 믿어라 하고 서로 승강이를 하고 경쟁(競爭)을 할 때 중국의 천자(天子)가 “너희들 그렇게 승강이를 하지 말고 모두 너희들의 성경(聖經)을 가지고 와서 궁정(宮廷) 마당에 갖다 놓고 불을 살라서 타지 않는 경전(經典)이 있거든 그 교(敎)를 믿어라”라 했다. 

그래서 각 종교의 경전을 다 갖다 놓고 불을 싸지르는데 다른 것은 다 타고 불교경전은 책(冊) 겉만 약간 누렇게 그슬리기만 하고 타지 않았다. 그래서 천자(天子)가 말하기를 “다른 경전은 다 탓으니까 지금부터는 불교를 믿어라”고 했다. 

그래서 불교경전의 책 꺼풀을 누런 빛깔로 하는 것은 그 때 불에 태워도 안타고 책 꺼풀만 조금 누렇게 탔다고 해서 책 꺼풀을 누렇게 한 것을 황권적축(黃卷積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불교를 이것으로서 시험(試驗)했다. 또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때에는 불교를 세상에 펴기 위하여 천경림(天鏡林)을 베어서 절을 지으려고 하니 만조백관이 모두 다 불응(不應)을 해서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이차돈(異次頓·本名 朴厭觸)이라고 하는 사람이 조정(朝廷)에 사인(舍人)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나라 임금님이 하도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하루는 임금께 들어가 말하기를 “이 불교를 펼려고 하거든 신(臣)의 목을 베면 됩니다. 신(臣)이 임금님의 허락(許諾)도 없이 절을 지으려고 천경림(天鏡林)을 벨 테니까 그것을 죄목(罪目)으로 잡고 신의 목을 베십시오” 이러니까 임금께서 하시는 말씀이 “좋기는 좋지만 경(卿)은 내 사랑하는 신하인데 어찌 죽일 수가 있겠느냐?” 하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하도 마땅히 국가민족(國家民族)을 위하고 임금님을 위하는 것이 대절(大節)일진데 유비상지인(有非常之人)이라야 유비상지사(有非常之事)올시다. 비상한 사람이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지 비상한 사람이 없으면 비상한 일이 없습니다. 신이 불교를 위해 죽어가지고 일반(一般) 백성이 이 불교를 믿어서 복국위민(福國爲民)이라, 나라에 복이 되고 백성에게 이(利)가 된다고 하면 박염촉이 오늘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날이 올시다.”

이러니까 임금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것도 그래서 아무 날 이차돈이를 죽인다고 천하(天下)에 영(令)을 내려 놓으니 그 죽는 날에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모였는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그래서 박염촉이 목을 베이는 장대에 올라 서서 말을 하기를 “내가 지금 불교를 위해서 죽는데 만약 내 목에서 피가 나오거든 불교를 믿지 말고 내 목에서 흰 젖이 나오거든 불교를 믿어라.” 

그래서 칼을 가지고 목을 치니 그 목이 경주(慶州) 백율사(栢栗寺)에 가서 떨어지고 목에서는 흰 젖이 수 십장(數十丈)을 허공(虛空)으로 치솟았다. 그래서 신라불교(新羅佛敎)가 이차돈이 죽었기 때문에 성(盛)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모든 경전을 불태워 가지고 불교가 성했고 신라 때에는 이차돈이 죽어서 흰 젖이 수 십장으로 올라간 때문에 신라불교가 흥성했는데 여러분도 불교를 믿거든 철저하게 믿어야 된다. 

이것이 선대에서 임금과 신하가 시험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불교를 믿으면 복국위민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을 시험을 했고 우리나라에는 신라 때 이차돈이 죽음으로서 이 불교가 나라에 복이 되고 백성에게 이가 되느냐 하는 것을 시험해 놓았으니 다시 의심(疑心)할 것이 없다. 

그래서 신라에서는 이차돈이 죽고 나서 집집마다 다 불교를 믿었다. 

그래서 이차돈이 죽은 후 고려의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이차돈의 사당에 와서 송(頌)을 지은 것이 있는데 

천리귀래문사인(千里歸來問舍人) / 청산독립기경춘(靑山獨立幾經春) / 약봉말세난행법(若逢末世難行法) / 아역여군불석신(我亦如君不惜身) 

천리 길을 남으로 와서 사인을 물으니 / 푸른 산은 홀로 서서 몇 봄을 지냈던고 / 만약 말세에 법을 행하기 어려움을 만나면 / 나도 또한 그대와 같이 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그러니 여러분도 어쩌든지 불교를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믿으면 전지전능(全知全能)이라 안될 것이 없다. 그러니 이차돈이 불교를 위해서 순교(殉敎)한 때문에 오늘 날까지 불교가 이렇게 내려온 것이고 사람이 다 살기를 좋아 하지 죽기를 싫어하는데 내 목숨을 불교를 위하여 바쳤기 때문에 불교가 오늘 날까지 내려 온 것이 이차돈의 힘이 큰 것이다. 

할(喝) 일할(一喝)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불교신문> 전신 <대한불교> 753호(1978년 8월6일자) 2면에 실린 경봉대종사 특별설법.

■  경봉스님은 …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은 광주 김씨이며,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으로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 7세 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고 16세때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강원을 졸업 후 내원사, 해인사,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의 선담(禪談) 후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27년에 통도사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던 중 11월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이후, 한암, 제산, 용성, 전강 스님등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두터이 한다.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한 뒤부터 5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지금의 선학원) 이사장을 거쳐 1949년 4월에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되다.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ㆍ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82년 7월17일(음 5월27일)에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문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열반에 드니 세수 91세, 법납 75년이였다. 

[불교신문3439호/2018년1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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