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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 (2018).12.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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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항일운동, 그 현장]<16> 정미의병 근거지 용문사 등“왜 만세를 불렀나” … “조선이 독립된다니 불렀소”
1907년 국권을 되찾기 위해 봉기한 양평지역 의병들이 주둔지로 삼았던 상원사의 현재 모습. 당시 일본군은 상원사를 비롯해 용문사와 사나사에 불을 질렀다.

1907년 일제에 맞서 의병 봉기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 주둔지
일본군 격전 후 사찰에 불 질러
용문사 이세춘스님 3·1운동 참여

1907년 8월24일. 일본군 보병 제9중대 무장 병력이 양평 용문산에 자리한 천년고찰 용문사(龍門寺)에 들이닥쳤다. 용문사에 근거지를 둔 의병(義兵)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종 황제가 일제의 조선 침략 부당성을 세계 각국에 호소하고자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뒤 강제 퇴위 당한 상황이었다. 앞서 7월1일 일본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 시켰다.

일제의 이러한 폭거(暴擧)에 분노한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의병의 무력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1907년 정미년(丁未年)에 발발해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고 한다. 양평도 의병들의 항일 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무장군대를 동원해 근거지 가운데 한 곳인 용문사를 습격해 불을 질렀다.

당시 양평에서 봉기한 권득수(權得洙), 조인환(曺仁煥)을 비롯한 의병들은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중심으로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군에 비해 열악한 조건의 의병들은 용문사에서 퇴각해 상원사와 사나사로 피한 후 맞서 싸웠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상원사와 사나사까지 소각(燒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항일의병의 근거지였던 양평 상원사를 찾은 지난 10월 24일. 용문산은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붉은색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물든 산천은 구국(救國)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목숨 바쳐 항거했던 의병들의 단심(丹心)을 증명하는 듯 했다.

양평 용문사 입구에 자리한 한국민족독립운동발상지, 항일운동기념비. 양평의병 기념비, 용문항일투쟁비 등이 서 있다.

상원사 대웅전 오른편에 서 있는 ‘양평의병 전투지 - 상원사’라는 입간판이 111년 전의 일을 전하고 있었다.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 용문산의 상원사를 비롯하여 용문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 양평의병은 1907년 8월24일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가 용문사를 습격해오자 상원사로 후퇴하여 항쟁하였다. 이때 상원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사나사에서도 대한제국 의병들과 일본군 보병 제13사단 제51연대 제11중대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의병들은 우월한 무장력(武裝力)을 갖춘 일본군을 상대하기에 힘이 모자랐다. 일부는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일부는 용문산으로 몸을 피했다. 일본군은 의병의 근거지였던 사나사에 불을 질렀다. 전각이 모두 불탔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자문 역할을 담당했던 대경국사(大鏡國師)가 제자인 융천(融闡) 스님과 함께 창건한 사나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倭軍)에 의해 불탄 이후 또 다시 참혹한 아픔을 겪었다. 1907년 당시 사나사는 사명(寺名)이 유래한 비로자나불이 봉안돼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국보급’이라고 한 철불(鐵佛)이었지만 일본군이 사찰을 소각하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됐다. 한국전쟁 이후 망실됐다.

같은 날 용문사에도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아카시(明石)를 위시한 일본군은 의병들의 식량으로 사용했을 식량과 주둔지였던 용문사에 불을 질렀다.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홈페이지에는 용문사를 ‘국내항일운동사적지’이며 ‘의병근거지’라 밝히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1907년 일본군의 보복으로 소실된 의병의 근거지”라면서 “(1907년) 8월4일 포천 출신 조인환은 의병진을 이끌고 양평 관아, 세무서, 우편소, 일본인 가옥 등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을 벌였다”고 했다.

1907년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활약한 양평 의병들의 모습. 영국 기자 프레들릭 맥켄지 촬영한 것으로, 최근 막을 내린 ‘미스터 션샤인’에서 재현된 화면이 나왔다.

특히 지평(砥平, 양평의 옛 지명) 출신 의병장 이연년(李延年)이 의병을 모집해 용문사를 주둔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연년 의병장은 군사를 매복해 기습하고 후퇴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해 용문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했다. 조인환 의병장도 용문사를 근거지로 해서 인근 지역의 관아,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하면 용문사는 의병항쟁의 총사령부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들은 지리에 밝은 잇점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 신속한 유격전을 거듭하며 깊은 산속에 자리한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기지(基地)로 적극 활용했다. 전과(戰果)도 거두었다. 이에 일본군은 의병 근거지와 후원하는 세력을 방화, 살육하는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독립기념관은 “이러한 만행으로 민가(民家)는 물론 많은 고찰(古刹)들이 방화로 인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용문사 일주문 옆에 자리한 양평의병기념비와 용문항일투쟁기념비 등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스님과 주민들의 애국심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1907년 의병 투쟁 당시 스님들의 참여 상황은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 구속된 이세춘(李世春) 스님의 재판 기록을 통해 가늠할 뿐이다. 1919년(대정 8) 6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세춘 스님은 본인의 신분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25세, 1월 5일생. 직업은 중앙학림 1년생. 주소는 경성부 숭일동 2번지 중앙학림 기숙사. 본적지는 양평군 용문동 신점리 34번지. 출생지는 강화군 길상면 고두동.” 신점리 34번지는 용문사에서 3.5km 떨어진 곳이다.

“피고는 승려인가”라는 판사(永島雄藏)의 질문에 “그렇다. 양평군 용문동 용문사의 승려로 그 절로부터 학비를 지급받고 있다”고 답한 것으로 보아 스님이 분명하다. 판사와 이세춘 스님의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어떠한 목적으로 만세를 불렀는가.” “만세를 부르면 조선이 독립된다고 하는 것이었으므로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어째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한 것인가.” “그것은 다른 주권 밑에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사람으로서 독립을 희망했던 것이다.”

양평 용문산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들을 촬영한 맥킨리의 사진을 재현한 tvN의 '미스터 션샤인' 의 장면. 화면을 캡쳐한 것이다.

이세춘 스님의 재판기록은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사찰이 소각되는 처참한 일이 발생했지만 불교계가 독립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미의병에 앞서 1895년~96년에 일어난 을미의병(乙未義兵) 때도 스님들의 참전(參戰) 기록이 전한다.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한 의병들이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에서 항쟁할 때 지평(양평의 옛지명) 인사들도 함께 했다.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를 다시 만들어 천일(天日)이 다시 밝도록 하라”며 봉기한 을미의병들은 세력을 확대해 충주에 집결했다. 이때 무총(武總)스님이 의승장(義僧將)을 맡았다. 이 기록은 의병투쟁에 스님들이 다수 참여했음을 증명한다.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주둔지로 삼아 활약한 양평지역 의병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전하고 있다. 의병 사진으로는 유일하며 교과서에 실려 있다. 최근 막을 내린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대미를 장식한 장면도 이 사진을 재현한 것이다. 1907년 양평에서 의병들을 직접 만나 취재한 영국 기자 프레들릭 맥켄지(Mackenzie, F.A)가 촬영한 것이다.

구식 총을 든 대한제국 군인과 농민, 상인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어 시청자들을 뭉클하게 했다. ‘미스터 션샤인’ 마지막 회의 한 대사는 1907년 일제에 맞서 사찰을 근거지로 투쟁한 의병들의 마음을 대신 전한다. “알고 있소, 이렇게 싸우다 결국 죽겠지. 허나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소.”

일본군 만행 피한 ‘상원사 동종’

1907년 용문산에 있는 사찰을 소각한 일본이 강탈했다가 돌아온 ‘상원사 동종’

용문산 상원사 도량 한편에 자리한 동종(銅鐘)이 의병투쟁을 대신 전하고 있다. 이 동종은 1907년 일본군이 상원사에 불을 질렀을 때 겨우 화마(火魔)를 피했다. 일본군은 이 종을 탈취하여 경성에 있는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겼다. 일본은 1939년 보물로 지정했고, 해방 후에는 동본원사에서 조계사로 옮겨 보관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보로 지정했지만 1962년 황수영 박사가 “일본인들이 상원사 본종을 빼돌리고 다른 종으로 대체했다”고 주장해 해제됐다. 이후 국내외 학자들이 “일본종이다” “중국종에서 신라종으로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국내 유일의 범종이며 진품이다”라는 엇갈린 입장이 제기됐다. 1996년 상원사는 호산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범종 반환불사를 추진해 2009년 총무원 종무회의를 통해 결실을 맺었다. 2010년 1월21일 상원사로 돌아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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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양평 3·1운동사>, <일제강점기 양평 관계 사료집성>, <양평독립운동사자료집> <독립운동사자료집>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양평군지>

양평=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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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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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無影塔 2018-10-30 15:38:24

    스님들께서
    독립운동을 하시고

    항일 운동을 하신
    소중한 사료들이네.


    많은 국민들이 알아야 하고
    불자들은 모든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할 소중한 자료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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