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바다 위 청청한 허공에 나투는 부처님

①운해(雲海)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일교차가 큰 요즘 같은 날씨에 옥천 용암사를 찾으면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고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태어나 살았던 각자의 고향도 있지만 다른 한 쪽에 상상 속에 농촌의 정겨운 이미지가 있다. 한편의 시 그리고 노래가 우리들 상상 속 고향을 지배하고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시인의 ‘향수(鄕愁)’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정지용 시인은 12세 때인 1913년 결혼하고 17세 때인 1918년 서울로 유학을 떠난 이후 1923년 일본으로 다시 유학을 떠나 1929년 귀국을 한다. 이 시 ‘향수’는 1927년 발간된 <조선지광> 잡지에 발표됐다.

시에는 집 떠나온 지 오래 그것도 먼 타국에서 ‘참하’ 잊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정지용 시인의 고향 충북 옥천을 지난 13일 찾았다. 

옥천 하면 떠오르는 곳이 일출로 유명한 용암사(龍巖寺)다.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옥천지역에 대청댐이 생기면서 일교차가 큰 요즘 같은 날씨에 새벽안개가 가득 낀다. 장령산(656m)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중턱에 있는 용암사까지만 오르면 옥천읍 남쪽 지역이 한눈에 펼쳐진다. 발품을 별로 팔지 않고도 운해(雲海)를 감상할 수 있는 건 큰 행운이다. 하지만 늘 운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요즘처럼 일교차가 크면 운해가 생길 확률이 높다. 늘 제때 온다고 했지만 전에는 아름다운 운해를 보진 못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②늘 해가 뜨는 동쪽으로 바라 보고 계신 용암사마애불.

옥천IC를 빠져 나오니 안개가 가득 차있다. ‘오늘은 제대로 볼수 있을까’ 기대감에 마음이 조급하다. 바쁘게 고개를 올라 용암사로 향한다. 방문객이 많은 탓인지 주차장이 위쪽 아래쪽에 잘 조성되어 있다. 6시30분 쯤 해가 뜬다고 했는데 10분 전에 겨우 도착했다. 하늘은 이미 붉은 빛이 퍼져나가고 있다. 부지런히 용암사를 향해 계단을 오른다. 대웅전 앞에서 인사를 올리고 위쪽을 바라보니 천불전과 대중전 사이에는 이미 사진 찍는 분들이 가득 차 있다. 대웅전 옆에 위치한 천불전 바로 뒤쪽에 거대한 암반이 솟아 있는데 그곳에 충북유형문화재 제17호 용암사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그곳에서 하늘이 활짝 열려 있어서 운해 일출을 보는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가파른 계단을 급하게 오른다. 짧은 거리인데 너무 오랜 만에 몸을 쓴 탓인지 격하게 운동한 후 같이 심장이 터질 듯 쿵쾅 거린다. 눈앞의 풍경은 너무 고요한데 몸 속 소리는 요란하기만 하다. 몇 차례의 심호흡 후 시간이 지나자 주변 풍경이 점점 눈에 들어온다. 구름바다는 마치 거대한 물결처럼 몇 몇 산봉우리를 제외하고 아래 세상을 다 덮고 있다.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떠 있는 느낌이다. 매일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는 마애부처님은 연꽃대좌를 타고 구름바다 위를 떠다니는 듯하다. 

용암사는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법주사 보다 13년 빠른 신라 진흥왕 2년(541)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 천년사직의 무상함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 이곳에 머물러 지내다가 떠나자 후에 그를 추모하던 자가 그를 그리며 마애불(磨崖佛)을 조성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③보물 제1338호 용암사 쌍삼층석탑. 용암사가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바위 언덕에 세워졌다.

마애부처님은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3m에 달한다. 마애불 아래 누군가 올린 초가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마애부처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구름바다 위로 붉은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용암사 구름바다 위 일출을 맞이하게 되었다. 감동할 시간은 잠시 여기 저기서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덩달아 바빠진다. 

‘찰칵, 찰칵’ 붉은 해는 경쾌한 셔터 소리에 맞춰 조금씩 솟아오른다. 웅장한 교황곡이 울려 퍼지듯 붉은 기운이 세상을 물들인다. 차가운 바위에 새겨진 마애부처님도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자비로운 미소를 보낸다. 자연이 선사하는 화려했던 아침 공연이 끝나자 용암사가 눈에 들어 온다. 용암사는 신라 때 창건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사세(寺勢)가 컸는데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법등을 근근이 이어오다 근래에 복원되었다. 용암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성보가 또 하나 있다. 대웅전 좌측 언덕을 이루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쌍삼층석탑으로 보물 제13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쌍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성행했던 산천이 쇠퇴한 기운을 복돋아 준다는 산천비보사상(山川裨補思想)을 바탕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산천비보사상으로 건립된 석탑들은 대부분 단탑이고 높이가 2~3m로 작은데 비해 용암사 삼층석탑은 유일한 쌍탑이고 동탑은 높이가 4.3m, 서탑은 4.1m로 거대하다. 쌍탑이 세워진 곳은 용암사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일출을 감상한 벅찬 가슴을 담고 산을 내려가 정지용 시인의 생가로 향한다. 산 아래 세상은 짙은 안개가 덮고 있다. 정지용 시인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월북된 것으로 알려져 1988년까지 37년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가족들 또한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한국전쟁 중에 폭사했다는 설이 있다. 

④정지용 생가 앞에 세워진 ‘향수’ 시비.

생가 앞에는 ‘향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를 읽으니 자연스럽게 알고 있던 리듬이 떠오른다. 흥얼거리며 눈으로 읽는다. 음에 따라 노래 부르던 때와 다르게 내용이 정확히 다가온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름답고 그리운 고향이다. 

정지용 시인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도 썼지만 실제로 다시 돌아와 ‘고향’이란 시도 썼다.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어린 시절에 품었던 꿈도 어느덧 사라지고 없고 기억 속 풀피리의 아름다운 선율이 사라지고 메마르고 말았다. 푸른 하늘을 가진 자연은 변함이 없지만 인생은 무상하기만 하다고 느낀듯하다. 무상하기만 인생 속에서 시인의 애틋한 마음을 전해 받으며 작은 행복을 느낀다.

[불교신문3434호/2018년10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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