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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30> 청평거사 이자현의 능엄선“성품 기르는 데는 욕심 적게 갖는 것이 최상”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8.10.0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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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엄경이 곧 심종(心宗)…
중요한 길을 밝히고 있는데 
왜 읽지 않는지 한탄할 일”

능엄도량 개설, 주석서 편찬 
능엄경 관심 지대 ‘능엄대사’
거사불교 일어나는데 큰 영향

이론적인 부분 집약된 ‘견성’ 
수행적인 부분 집약된 ‘문성’ 
두 축대로 능엄선 도출 추측
 
“해동심법’ 유포에 공로 지대”
이인로 ‘파한집’에서’ 평해
이규보 만년에 능엄경 심취

춘천 청평사는 ‘청평거사’ 이자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오랜 수행처다.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비문이 파손되어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어느 나라 불교이든 재가자의 활동이 활발하다. 대승불교 국가인 우리나라도 점차 재가자의 활동이 넓어지고 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대표적인 거사를 보면, 이자현, 이규보, 낙헌(樂軒) 이장용(1201∼1272년), 동안(動安) 이승휴(1224∼1300년), 윤언이(尹彦頤, ?∼1149년) 등이다. 

 윤언이는 금강제(金剛齋, 현 경기도 포천)에 머물면서 스스로 ‘금강거사’라고 자칭하며 수행하였고, 담선법회가 개최될 때마다 법회를 주관했다. 백운(白雲)거사 이규보(1168∼1241년)는 <동국이상국집>의 저자로서 당대를 대표하는 사대부였다. 그는 자칭해 ‘유학자로서 지관(止觀)을 배운 사람’, ‘참선하는 늙은 거사’라고 할 만큼 불교와 밀접하다. 이규보는 당시 진각국사 혜심과 함께 불교시의 문학성을 최고조로 고양시킨 인물로 인정받는데, 불교에 대한 단순한 소재를 넘어 문학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고려 재가불교와 청평거사 

청평사 전경.

이자현(李資玄, 1061~1125년)은 인주 이씨 출신이다. 이자현은 진락공(眞樂公) 청평거사(淸平居士)로 알려져 있으며, 보조지눌 이전 고려 선사상의 맥을 잇고 있는 인물이다. 거사는 24세에 진사가 된 뒤 줄곧 벼슬길에 머물렀지만, 갑자기 아내를 잃은 후 29세에 청평산으로 들어가 문수원(文殊院)을 수리하고 거주했다. 거사는 임진강을 건너면서 “이제 가면 다시는 서울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자현이 선(禪)과 인연된 것은 <설봉어록>에 의해서다. 설봉 의존(雪峰義存, 822~908년)의 어록 가운데 ‘온 천지가 다 눈(眼)인데, 그대는 어디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가(盡乾坤 是箇眼 汝向什麼處蹲坐)?’라는 구절에서 활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시절인연 후, 이자현은 불조의 어떤 가르침에도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거사는 우리나라 명산을 탐방하면서 성현(聖賢)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거친 음식을 먹고, 옷차림 또한 검소했다. 거사는 홀로 앉아서 늦은 밤까지 선정에 들었으며, 어느 때는 반석 위에 하루 종일 앉아 있기도 했다. 거사는 선정이 점차 깊어졌는데, 한번은 견성암에서 선정에 들었다가 7일 만에 출정(出定)하기도 했다. 이자현은 수많은 경전 가운데 특히 <능엄경>을 중시했다. 이자현보다 앞선 인물인 대각국사 의천이 ‘능엄대사(楞嚴大師)’라고 할 만큼 중국에 머물 때부터 능엄경에 관심이 많았다. 의천은 고려에 돌아와서도 능엄도량을 개설하고, 능엄경 주석서를 편찬했다. 이런 사회적인 영향 속에서 이자현은 능엄경의 이론적인 부분이 집약된 견성(見性)과 수행적인 부분이 집약된 문성(聞性)을 두 축대로 ‘능엄선’이 도출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유래해 이자현은 자신의 수행터를 법당은 ‘문성’이라 하였고, 암자는 ‘견성’이라 했으며, ‘선동(仙洞)’, ‘식암(息庵)’ 등 각각의 당호를 지었다. 

그러면 능엄경의 어떤 점이 선(禪)과 관련되는지를 보자. ‘견성’은 능엄경에서 망심을 타파하는 칠처증심(七處證心)과 진심(眞心)을 세우는 10견(十見), 진심을 확대하여 일체 존재가 여래장을 구족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능엄경에서 수행방법으로 25원통을 제시하는데, 이중 관음보살이 수행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이근원통은 반문문성(反聞聞性), 즉 듣는 성품(聞性)을 다시 돌이켜 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자현은 “내가 대장경을 다 읽고 많은 책을 두루 열람하였으나 <수능엄경>이 곧 심종(心宗)에 부인(符印)하며, 중요한 길을 밝히고 있는데,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 왜 이 경(經)을 읽지 않는지 한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1121년 60세 무렵, 거사는 왕명으로 능엄법회를 열 때는 제방의 선자들이 모여 그의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이자현의 선적인 면모는 당시 국왕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예종(1079~1122년 재위)이 누차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그는 번번이 거절했다. 그러다 오늘날의 서울인 남경(南京)에서 둘 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서 왕은 이자현에게 수신(修身)과 양성(養性)의 핵심을 물었고, 이자현은 왕에게 ‘성품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이 최상’이라는 고인의 말씀으로 답변했다. 

 이자현은 당시 교종인 화엄종과 법상종의 다툼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곧 거사는 교종 승려들과는 인연이 없는 대신 선종의 혜조국사 담진과 깊은 교류했고, 대감국사 탄연과도 법연을 맺었다. 이자현의 제자로는 지원(知遠)과 조원(祖遠) 등이 있다. 조원은 이자현의 뒤를 이어 문수원의 주지를 맡았다(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거사 신분인 이자현의 능엄선이 그 당시로서나 고려시대를 넘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자. 

청평사 입구에 위치한 이자현 부도.

 첫째, 능엄선이라는 독특한 선사상이다. 오늘날 능엄경에 의한 능엄선이 이론과 실천에 의해 정립됐다고 보지만, 능엄선이라는 개념 자체도 모호하며,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사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이자현이 스승 없이 스스로 개척해 능엄선을 정립한 점에 있어서는 높이 살만하다. 

 둘째, 이자현은 출가하지 않았지만, 거사불교의 대표 인물로서 당대를 비롯해 후대 거사불교가 일어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인로의 <파한집>에 따르면, ‘해동에 심법(心法)이 유포된 데는 이자현의 공로가 지대했다’고 평했다. 이규보는 만년에 불교를 탐구하였고, 능엄경에 심취하여 송을 남길 정도였다. 이자현에 의한 거사불교 움직임은 근자에 이르기까지 귀감이 되고 있다. 

 셋째, 능엄선은 거사에 의한 것이지만 당시 선종계의 발전을 꾀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승려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淸平山文殊院記). 영향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희양산문의 승형(承逈, 1171~1221년)이다. 승형의 시호는 원진(圓眞) 국사로 이자현보다 100년 이후 인물인데, 대감국사 탄연이 쓴 ‘청평산문수원기’를 보고 크게 감명 받았다. 승형이 능엄경을 펼치게 된 유래와 업적이 ‘보경사원진국사비문’에 드러나 있다. “대사는 청평산에 가서 진락공의 유적을 방문하고 ‘문수원기’에 ‘이자현이 문인에게 수능엄은 심종(心宗)의 요체이고, 긴요한 이치를 담고 있다’고 한 부분에서 깊게 감동받았다. 승형은 문성암(聞聲庵)의 주지가 되자, 능엄경을 통독(通讀)하여 제상(諸相)이 환상임을 꿰뚫어 알았고, 자심(自心)의 광대함을 확인했다… 능엄경으로서 최상을 삼았으니, 이러한 경향이 세상에 성행하기는 대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승형은 입적하던 해에도 강회(講會)에서 능엄경을 강의할 만큼 이 경전을 중시했다.

➲미래지향 재가불교 역할은?

 부처님 재세 시 기원정사를 보시한 급고독장자를 비롯해 빔비라사라왕 등 수많은 재가자들이 불교 교단을 옹호하며 공양 올렸다. 이후 기원전 1세기를 전후로 대승불교의 주역 가운데 일부가 재가자들이다. 이점은 반야부에 속한 <유마경>의 설법자가 유마거사인데, 유마는 이전 부파교단의 수행자들을 ‘소승’이라 비판하며, ‘대승’을 표방한 대표 사례이다.  

 당나라 때 백거이(白居易, 772~846년)는 흥선 유관(興善惟寬, 755~817년)의 법맥을 받았다. 왕유(王維, 700~761년)는 중국문학사에서 시불(詩佛)이라고 부를 정도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시를 썼으며, 자신의 성 ‘왕’씨에 유마힐의 ‘마힐’을 따 스스로 왕마힐(王摩詰)이라고 자처했다. 배휴(裵休, 797~870년)는 종밀(宗密, 780~841년), 위산(潙山, 771~853년), 황벽(黃檗, ?~856년)에게서 공부했고, 황벽의 어록인 <전심법요>와 <완릉록>을 편집했다. 송대의 소동파(蘇東坡, 1037~1101년)는 동림 상총(東林常總, 1025~1091년)의 법맥을 받았으며, 무진(無盡)거사 장상영(張商英, 1043~1121년)은 처음 황룡파에서 공부한 뒤에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년)과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년)에게 수행했다. 원대의 야율초재(1190~1244년)는 만송 행수(萬松行秀, 1166~1246년)의 제자로서 몽골 징기스칸의 책사이다. 또한 청나라 말기 서구세력의 영향과 잦은 난에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연구하며, 서적과 경전을 출판한 이들이 재가자들이다. 

춘천 청평사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문수원 중수비로 청평산 문수원의 중수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이와 같이 재가자 중에는 승려보다 뛰어난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과거를 본받아 미래에 재가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점점 사람들이 출가에 흥미를 잃어 가고 있다. 출가자가 매년 줄고 있어 이대로 지속되다가는 교단이 흔들릴 상황이다. 부처님 재세 시 부처님을 한 번도 뵙지 않고도 불교 진리가 좋아서 출가하는 자가 수백 수천이었다. 조선시대, 불교가 핍박받고 승려들에 대한 권익이 땅에 떨어졌어도 출가자는 줄지 않았다. 즉금의 현대인들은 ‘불법(佛法)은 훌륭한 진리이다’, ‘출가하면 얼마든지 삶을 주도적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해도 출가에 시큰둥하다. 이는 인구가 줄고, 기존 승려들의 계율정신이 해이해서가 아니라 문화적인 흐름 때문이다. 이에 재가자는 제2의 대승불교라고 생각하고 재가자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한편 교단은 재가자를 양성시키며, 교단 참여의 발언권을 줌과 동시에 함께 운영하는 방식이 도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불교신문3429호/2018년10월6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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