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구제 위해 무간지옥까지 찾아 가리라”

 

명부전 주존, 사후세계 교주 
지장보살은 고통 받는 중생 
구제하기 위해 성불 포기 

친근한 스님과 같은 모습
두건 쓴 독특한 형상 눈길
조선시대 많은 불화 조성

①일본 도쿄 네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 지장보살도.

사찰에 가면 모든 불자들이 즐겨 찾는 곳 중의 하나가 명부전이다. 돌아가신 분의 영가천도를 위하여, 또 사후 극락왕생을 위해 명부전을 찾은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간혹 명부전에 들어가면 왠지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아마도 다른 전각들과 달리 많은 상과 불화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입구에는 험상궂은 얼굴로 몽둥이를 들고 서있는 인왕상이 노려보듯 우뚝 서있고, 좌우로는 명부의 심판관인 시왕이 판관과 사자, 선악동자 등을 대동하고 때로는 인자한 얼굴로 때로는 무서운 얼굴로 심판하는 듯한 모습은 영락없이 사후세계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정중앙에는 자비로운 모습의 보살이 좌우 협시를 거느리고 앉아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후세계의 교주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이다. 

명부전의 주존이자 사후세계의 교주(敎主)인 지장보살은 관음보살과 함께 우리나라 2대 보살의 하나로 널리 신앙되었다. 사후 극락왕생과 영가천도를 비는 명부신앙의 중심 교주으로, “위로는 부처님의 도를 구하며,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 보살도를 실천하며, 천(天)·인(人)·아수라(阿修羅)·축생(畜生)·아귀(餓鬼)·지옥(地獄) 등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하나라도 남김없이 구제하기 위해서 성불(成佛)마저도 포기한 대비(大悲)의 보살이다. 보통 보살이라 하면 화려한 보관을 쓰고 온몸에는 온갖 영락으로 장식한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지장보살은 중생제도의 서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중생과 친근한 성문(聲聞)의 모습, 곧 ‘안으로는 보살의 행을 숨기는 밖으로는 성문의 모습(內秘菩薩 外現聲聞)’으로 표현되곤 한다. 승려와 같은 형상에 한 손에는 석장(錫杖), 다른 한 손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들고 있는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이 바로 지장보살의 모습이다. 

지장보살 신앙은 원래 인도에서 대지의 신으로 신앙하던 지천(地天)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반면,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보살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일찍이 6세기경에 화가 장승요(張僧繇)가 선적사(善寂寺) 벽 위에 지장보살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실크로드에 위치한 돈황석굴에는 9~10세기경의 지장보살도가 50여 점이나 남아 있어, 이른 시기부터 지장보살 신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 지장보살도는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 기메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의 형식도 독존도(獨尊圖)를 비롯하여 관음보살과 함께 그려진 관음지장병립도, 시왕과 함께 그려진 지장시왕도 등 다양하다. 그 중에는 승형(僧形)의 지장보살도와 함께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독특한 형상의 지장보살도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이마 부근에 다른 긴 끈 모양의 천으로 좌우 귀 앞에서 묶어 끈의 앞단을 두 가닥 앞으로 내린 모습이다. 이런 모습의 지장보살은 두건지장(頭巾地藏) 또는 피모지장(被帽地藏)이라고 부르는데, 이와 같은 형상은 우리나라의 지장보살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검은 바탕에 금니(金泥)로 작은 원문을 그린 천을 두건형으로 하여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두르고 귀 뒤로 하여 어깨까지 내린 모습의 지장보살이 많이 그려졌다. 또한 돈황에서 발견된 지장시왕도는 중앙에 앉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관을 쓰고 홀을 든 시왕과 동자, 옥졸, 판관, 사자 등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현재 10여점 정도가 전하고 있다. 이런 형식 또한 우리나라의 지장시왕도 형식과 매우 유사하여, 그 도상적 연원이 중국의 지장보살도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②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725년 조성된 북지장사 지장시왕도.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중엽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지장보살신앙이 전파되었다. 같은 시기, 석굴암의 감실에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는 것을 보면 지장보살신앙이 성행했던 듯하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지장보살신앙이 아미타정토신앙과 결합되면서 크게 인기를 모았다. 삼성미술관소장 아미타삼존내영도는 임종을 맞이한 사람을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과 함께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지장보살신앙이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정토신앙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지장보살은 명부전(또는 지장전)의 주존으로 봉안됨에 따라 조각과 그림으로 다수 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작품이 남아있다. 현재 국내·외 박물관과 사찰 등에 남아있는 지장보살그림은 독존도를 비롯하여 무독귀왕(無毒鬼王)·도명존자(道明尊者)와 함께 표현된 지장삼존도, 지장보살과 권속들을 그린 지장보살도, 그리고 거기에 시왕을 덧붙인 지장시왕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중 일본 젠도지(善導寺)소장의 고려 지장보살도는 아름다운 초화문이 시문된 가사를 입은 귀공자형의 지장보살이 우아한 자세로 석장을 받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히 고려시대의 지장보살도 중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일본 세이카도분코(靜嘉堂文庫)미술관소장 지장시왕도는 화면의 정중앙에 정좌하고 앉은 지장보살 아래 망자를 심판하는 시왕과 그를 보좌하는 판관, 망자의 죄상을 적은 두루마리를 받쳐 들고서 막 들어온 듯한 지옥사자에 이르기까지 사후세계의 존상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서, 마치 망자를 심판하는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개국초부터 강력한 억불숭유정책을 실시하였던 조선전기에 이르면 사찰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듦에 따라 명부전의 조성 또한 크게 쇠퇴하였다. 그렇지만 지장보살신앙은 추선공덕(追善功德)과 영가천도(靈駕薦度)를 위한 명부전의 주존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더 확고해짐에 따라, 주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예수재(預修齋)의 본존으로서의 성격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불화 또한 많이 조성되었으며, 그 결과 현재 전국의 사찰에 남아있는 지장보살도는 수백 점에 달한다. “산에는 절이 있고 절에는 시왕전(명부전)이 있다”는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절마다 명부전이 있고 그 안에는 반드시 지장보살도가 봉안되어 있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현재 남아 전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수에 달하는 지장보살도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③1841년 조성된 대구 동화사 지장시왕도(보물 제1773호).

조선시대 지장보살도의 형식 또한 고려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고려시대의 작품에 비하여 훨씬 많은 권속들이 표현되었고, 인물의 모습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명부전 뿐 아니라 대웅전 등 주전각에도 지장보살도가 봉안되었다.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도는 상단탱화로서의 기능을 갖는 대신 대웅전 등에 봉안된 지장보살도는 중단탱화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등 기능과 역할이 조금 달랐다. 또 표현방식에서도 명부전의 지장보살도는 대개 시왕이 생략된 간단한 형식을 보여주는 반면, 대웅전 등의 지장보살도는 지장보살과 시왕을 함께 표현하는 복잡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권속들의 모습은 민간신앙적 요소와 결합되면서 민간의 취향에 맞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어려운 사찰이라도 대웅전과 명부전은 반드시 갖추었다는 사실을 보면, 사찰에서 지장보살신앙이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육도 가운데서도 가장 혹독한 고통을 받는 지옥의 중생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한다는 철저한 중생제도를 서원으로 삼고, 지옥을 주거처로 삼아 무불세계(無佛世界), 말법시대의 중생을 대상으로 교화를 펼치고 계신 지장보살. 마지막 한사람의 중생이라도 구원을 받지 못하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 까닭에, 육도 어느 곳이든지 몸을 바꾸어 나타나 끊임없이 중생을 구제하는 무한한 공덕을 지닌 지장보살. 사후 중음(中陰)에서 헤매는 망자들이 육도윤회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며 제작, 봉안한 지장보살도는 그야말로 인간의 사후에 대한 신앙과 관념을 가시적으로 묘사한 그림이자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죽음의 문제를 형상화된 이미지를 통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작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불교신문3417호/2018년8월22일자]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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