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조 화백, 29일∼9월3일까지 8번째 개인전 ‘우주 형상전’

장건조 작 '우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서양화가 장건조 화백의 여덟 번째 개인전이 오는 29일부터 9월 3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 4층에서 열린다.

‘우주 형상전’이라는 명칭으로 개인전을 갖는 장건조 화백은 ‘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하나의 점에서 출발해 다양한 형상을 연출해 낸 작품 30여점을 선보인다. 장 화백은 어둠과 밝음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무한한 형상이 내재되어 있는 우주를 기(氣)로 가득 채운 점의 형상을 그림에 담아냈다. 이러한 작품을 장 화백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인간의 형성이 우주이며, 그것은 곧 하나의 점으로 표현되는 절대추상의 회화”라고 말한다.

진제 종정예하가 주석 중인 부산 해운정사와 원로의원 대원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공주 학림선원을 찾아 수행 정진하기도 한다는 장 화백은 신심이 돈독한 모친의 영향을 받아 늦게 불교에 귀의해 ‘대해(大海)’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장 화백의 작품세계에 대해 서성록 미술평론가(안동대 미술학과 교수)는 “삭막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기회의 멍석을 깔아주는 그림이 장 화백의 그림”이라며 “이번 전시회는 모처럼 자아를 성찰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장건조 화백은 홍익대 미술교육과와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술교사와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5년 ‘장건조 입체작품전’을 연 이후 개인전 8회와 수십 회의 단체전을 열기도 했다.

장건조 작 '우주 2'.
장건조 작품 '내 기억 속의 짝지'.

해설/ 장건조,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미술평론가)

미술가 장건조는 주로 부산지역을 무대로 ‘부산미술제’라든가 ‘가톨릭 미술인전’, ‘포인트전’ 등에 참여해 오면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설치와 입체, 그리고 형상을 넘나드는 역동적인 창작활동을 통해 통일의 문제, 때로는 다문화 가정과 같은 우리 사회의 현안 이슈와 연관된 주제를 폭넓게 다루어왔다. 2014년에는 입대한 늦둥이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를 한데 묶은 책 <아들아>로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작가는 몇 년 전부터 종래의 작품과 약간 구별된 자아성찰적인 작품세계, 즉 우주형상을 주제로 한 일련의 추상작품을 발표해왔다. 추상작품이지만 어떤 조형의 극한으로 치닫는 작품도 아니요 특정한 담론에 치우친 회화도 아닌 , 구도적 삶을 살면서 깨닫게 된 이치를 한 폭의 그림에 담게 된 것이다. 언제나 청춘인 줄 알았던 그가 점차 연륜이 쌓이면서 인생의 의미와 그에 대한 성찰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추상적인 작품에 경도하게 된 배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의 도상은 간결하다. 화폭에는 달랑 ‘점’ 하나가 그려져 있는데 어디에도 모나지 않은 원(圓)의 세계이고, 그 주위에 금색 아우라가 반짝거린다. 대부분이 캔버스 위에 유채로 된 작품이고 일부는 옛 가옥의 문짝에다 한지를 덮어 그린 것도 있다. 명료한 도상이지만 그것에 얽힌 사연도 남다르다. 그는 늦게 불교에 귀의하여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를 착실히 지키며 수행과 신행생활에 열중하며 지내오고 있다. 작가는 불교와의 인연을 맹구우목(盲龜遇木), 즉 눈먼 거북이가 물속에서 지내다가 숨을 쉬기 위해 물위로 떠오르는 순간 나무토막 하나를 만나는 것처럼 매우 귀한 사건으로 설명한다.

그림이든 우주이든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점’으로 요약된다. 그림과 우주의 원초적 결정체가 ‘점’이고, 우주의 시작 역시 하나의 ‘점’이라는 깨달음에서 착안한 것이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다시 ‘면’이 되어 ‘입체’로 넓혀지듯이 존재의 근원이 ‘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점에 화가의 정신과 혼을 담아 우주 시리즈를 발표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가 던 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사실 현대사회는 너무나 외적인 것에 휘둘려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숱하다. 워낙 광범위한 정보와 빠른 변화, 물질적인 것에 예속되어 있다 보니 자아를 돌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모니 터나 텔레비전, 아니 면 스마트 폰을 보며 지낸다. 정보 매체의 범람과 쏟아지는 다량의 정보의 쓰나미에 자기에 대해서조차 소홀한 것이 현대인의 딜레마이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은 이제 머리를 비우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바란다. 피코 아이어(Pico Iyer)는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로 거리를 둘 때에만 삶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제언한다.

장건조의 명상적인 그림이 주는 함의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조차 없는 폭주의 대열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정체 불명의 자아를 돌보는 일이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짊어진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것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답한다.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 행복과 불행 역시 마음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도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켜야 한다.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잠언 4 : 23)고 명시하고 있다. 마음이 우리 삶의 근원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작가가 던 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할 수 있다면 부질없는 것과 허탄한 일을 조금이라도 제어함으로써 본질에 더 다가설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미니 멀 라이프’나 ‘워라밸’, ‘소학행’이 풍미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주하는 현대사회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자의식을 찾아가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욕망의 기차에 그대로 눌러 앉아있으면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른다는 것을 이미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화면의 동그라미가 암시하는 것은 복잡다단한 인생의 박스포장을 뜯고 보면 부수적인 것과 찌꺼기는 점차 사라지고 종내는 중핵적인 것과 마주한다는 것, 그 점같은 근본과 조우하고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이지만 장식적 기능으로 머물기보다는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연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모두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것은 아니 다. 이번 개인전에는 추억을 주제로 한 작품도 선보인다. 빨래판과 나무걸상 작품이 그것이다. <모심>(母心)으로 명명된 작품은 빨래판과 도마를 사용하시던 모친을 그리워하며 제작한 작품이다. 40여 년 동안 다니 던 가톨릭 교회를 떠나 불가에서 수행을 시작하였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모친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로서는 유독 신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를 저버리기 힘들었던 것같다. 그가 기용하는 빨래판이나 도마는 단순한 오브제가 아닌 , 특별한 사연이 있는 물건이요 작가는 거기에다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포개어 놓았다. 나무의자 작품 역시 유년 시절의 단짝을 회상하며 만든 작품이다. 초등학교 시절 사용했던 나무의자 두 개에 흰색을 칠하고 그 위에 파란 점을 찍었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을 함께했던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짝지’를 추억한다. 옛 동무와 헤어진 지 어언 60년 이 지났지만 그의 마음에는 그때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예술은 고요한 가운데 회상되는 각성에서 솟아난다’(William Wordsworth)는 말처럼 그는 추억에서 예술의 모티브를 건져 올린다.

흔히 장건조를 ‘통일작가’, ‘옹기작가’, ‘효(孝) 작가’ 등으로 부르는데 여기에 덧붙여 ‘우주작가’라는 이름을 하나 더 추가해야할 것 같다. 수행에서 얻는 깨달음을 기초로 하여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림을 ‘선화’(禪畵)로 부르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한다. 자신의 그림을 종교화로 범주화시키기보다는 그저 ‘구도적 삶’을 추구하는 작가, 그의 작품 또한 수신적, 명상적인 회화로 불리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화면에 자리 잡은 부동의 동그라미는 잘 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았고, 그저 동그라미일 뿐이다. 어떤 진자운동을 하며 살든 개체의 삶 그 자체는 고귀한 것이다. 그의 회화는 크든 작든, 출중하든 그렇지 않든 생명 자체가 귀하며 존재 자체로 충분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화면의 동그라미와 마주하는 순간 감상자가 신체적 움직임을 멈추고 사색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정신적 여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김이 빠지고 멍해질 수도 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감을 얻을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모처럼만에 자아를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메마른 지식과 삭막한 일상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기회의 멍석을 깔아주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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