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탄압 이겨낸 뒤 계파 통합

 

 

봉축행사 취소 등 불교탄압엔 소신공양 맞서
승가회 학원 연구소 설립 통해 불교발전 도모

1900년 라오스·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병합되면서 베트남의 정치적 독립은 또다시 어려움에 빠졌다. 이후 태평양전쟁 종결 이후 베트남독립동맹은 혁명에 성공해 조국을 해방시켰지만, 프랑스는 이듬해 다시 베트남을 지배하려는 전쟁을 시작했다. 1954년 베트남민족주의 세력이 승리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베트남은 60년대에 다시 ‘베트남전쟁’이라 불리는 세계사에 기록된다. 미국은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을 사이공(남부 베트남)에 만들었다. 이들은 반민족적 군사독재정부가 조국통일을 주장하는 광범한 대중을 탄압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이었던 정부 지도자들은 불교도를 이유 없이 탄압했다.

이에 임제종 종장(宗長) 틱꽝득스님은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비폭력 항쟁에 참여했다. 정부에 여러 번 간곡한 편지를 보내서 불교탄압을 중지해 달라고 촉구했지만, 지엠정권의 불교탄압은 중단되지 않았다. 반정부지도자 틱찌쾅스님은 “베트남에서 가톨릭은 100년, 공산주의는 50년, 민주주의는 20년 밖에 안됐지만, 불교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불교탄압은 곧 민주주의 세력의 탄압”이라고 정부를 공격했다. 불교는 베트남의 가장 중심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틱찌쾅스님의 외침은 베트남의 반향을 일으켰다. 

1963년 남부 베트남 불교도들은 반정부운동을 전개해 숱한 희생을 치루며 10개월 만에 군사정부를 무너뜨렸다. 특히 불교도들의 반정부 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있다. 1963년 부처님오신날. 경축 행사장과 가정에 불교기가 게양되자 응오딘지엠 정부는 베트남 공화국기가 아닌 종교기를 게양할 수 없다는 긴급명령을 선포했다. 불기를 내리고 경축행사도 취소했다. 종교차별에 반대하는 항의가 일어나자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군대는 최루탄을 사용했고 7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불자 8명이 참살 당했다. 이에 73살의 틱꽝득스님은 아스팔트 위에 좌선(坐禪)의 자세로 앉아서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댕겼다. 베트남불교의 한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 소신공양(燒身供養)은 정부의 불교탄압에 베트남불교도가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틱꽝득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일주일 사이 9명의 스님이 불교탄압에 대항해 분신을 했다.

이같은 베트남 불교도의 이같은 민족주의적 성향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진 왕조 중기에 몽고군이 침략한 때부터 완조시대에 프랑스가 침략한 때까지 계속 이어받는 대중적이며 민족적인 정치성향은 있었다. 응오딘지엠 정부가 멸망 후 1975년 나라가 통일되고 나서 틱찌투스님이 베트남 불교 여러 계파를 통합하는 운동을 펼쳤다. 1981년에는 베트남 불교승가회가 설립되었다. 1981년 하노이에서는 불교학원(Higher Buddhist Studies Institute)이 건립됐고 1984년에는 호치민시에 또 불교학원 한 곳이 더 설립됐다. 불교승가회의 목적은 승가에 다양한 활동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젊은 스님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스님들은 일반 과목과 특수과목까지 동시에 자유롭게 배울 수 있었다. 

수학하는 스님들은 불교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1989년에 설립된 베트남 불교연구소에서 연구자로서 근무하거나 국내외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베트남 불교 연구소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또는 과학적 발전에 따라 부처님 법을 전파하는 창조성을 강조한다. 또한 세계 불교 활동을 확대하고 다른 나라의 불교문화와 베트남 불교문화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불교신문3416호/2018년8월18일자] 

베트남 각려효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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