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산에 오른다. 지금 사는 곳도 산이지만 조금만 더 올라가도 다른 공기 다른 전망 사뭇 다른 세상이 펼쳐지곤 한다. 그곳에 몇 백 년 된 큰 소나무가 언제나 친근하게 나의 등받이가 되어 준다. 좌측에 남산이, 우측에 족두리봉이 타원형의 서울을 성벽처럼 감싸고 있고 그 한가운데를 유유히 한강이 흐르고 있다. 이 잿빛 도시를 떠나리라 결심하고 출가 한지 20년이 훅 넘었는데 다시 이렇게 서울의 한복판에 수도(首都)승이 되어 돌아와 있다. 너무 시야를 좁게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 한정되고 자신의 틀에 갇히게 되고 만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니 서울이 산과 강과 도시가 절묘하게 배합된 보기 드문 아름다운 도시처럼 보인다. 

잠시 눈을 감고 세상의 중심에 내가 이렇게 앉아 있다고 상상한다. 깊은 호흡을 통해 숲속의 신선한 기운을 더 깊게 받아들인다. 피부의 세포 구멍 하나하나 다 열어주고 마음의 창도 활짝 열어놔 본다. 지나간 해프닝들 질펀한 감정들 바람에 실려 말끔히 날아가 버릴 수 있도록.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허공을 가르듯 울린다. 바이올린 선율보다 아름답다.

한자로 관(觀)의 뜻은 숲 속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보라는 것이다.

아, 이렇게 새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문득 꽉꽉 채워놨던 내적 공간에 헐렁한 여백이 생긴다. 살면서 무슨 소리를 들으면 빠르게 판단하고 규정한다. LTE보다 빠른 속도로 온갖 기준 내세우고 묵은 경험 상식 다 올라와 꿰어 맞춘다. 그 퍼즐로 세상을 그려내고 그 그림에 열 받곤 한다. 그러니 다시 텅 빈 백지 바탕으로 돌아가는 건 일종의 마법에 걸리는 시간들이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요함과 아름다움이 깃든 공간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된 건 일종의 마법과도 같다.

아침 일찍 올라와 새소리 들으면서 세상의 시간을 멈추어 본다. 나무처럼 다만 숲의 일부가 되어서 순수한 의식으로 존재하는 시간,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맑아지고 치유된다. 마법처럼 단지 새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불교신문3416호/2018년8월18일자] 

선우스님 서울 금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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