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도 가피도 부처님 믿고 가는 사람에게 온다”

눈에 보이는 소백산 화엄세계
귀에 들리는 산사, 도반 소리도
성불위해 오직 한 길만 간다는
정취보살 ‘무이행’ 가르침인 듯 
장학금·약사여래 보시 이어가

‘53기도도량’ 제29차 순례법회는 지난 7월13, 14일 ‘무이행보살’로도 불리는 정취보살의 가르침을 찾아 예천 용문사에서 여법하게 봉행됐다.

‘53기도도량’ 제29차 순례법회가 지난 7월13, 14일 양일간 경북 예천군 내지리 소백산 용문사에서 여법하게 봉행됐다.

신록이 절정인 칠월의 이틀 간 우리 회원들은 예천군 소백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용문사로 순례를 나섰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나 어쩌랴, 옛날 도(道)높은 선지식들은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자연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선가(禪家)덕목이며 수행이다. 살갗을 찌르는 무더위도 곧 지나가기 마련이다. 

천년고찰 용문사로 가는 소백산 오솔길은 단풍나무가 지천을 이루고 있었다. 곧 가을이 오면 그 붉디붉은 빛깔을 내 비치리라. 이렇듯 자연은 항상 그 자리에서 머물고 있지만 때가되면 스스로 형색(形色)을 바꿀 터, 미련한 것은 인간들뿐이다.

오솔길을 따라 20여분을 더 지나자 단풍나무 사이로 법계와 속계의 경계를 나타나는 일주문이 두 개의 나무기둥을 하고 용문사 대중들과 함께 우리 회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약하지만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법계로 들어가는 진리의 문(門)이 그곳에 서 있었다.

용문사는 870년 두운선사(杜雲禪師)에 의해 창건, 현재 조계종 제8교구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사록은 <동국여지승람>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운선사가 만행을 하다가 소백산 자락에 이르렀을 때 두 마리의 용이 험난한 산길을 인도했다. 또한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신라를 치기위해 가다가 이곳에 머물렀는데 운무(雲霧)가 자욱하여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헤맬 때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서 길을 인도하였다는 설이 있다. 왕건은 천하를 평정한 뒤 이 절을 크게 중창하겠다는 약속을 청룡에게 한 데 이어 고려를 개국한 후 936년 (태조 19년)에 칙명으로 중건, 그 이름을 용문사라고 하고 150석의 벼를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명종 때 사명을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 ‘성불사 용문사’로 고쳤으며 정조 때 문효왕후의 태실로 쓰면서 지금의 ‘소백산 용문사’로 바뀌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선묵스님과 용문사 주지 청안스님이 네팔 룸비니에서 채화해온 평화의 불을 경내로 이운하는 모습.

우리 회원들은 선묵혜자스님과 용문사 주지 청안스님을 따라 경내로 올라갔더니 언덕 위에 높다랗게 ‘회전문(廻轉門)’이라는 편액을 단 맞배지붕 건물이 보였다. 이것은 ‘사천왕문’의 다른 이름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다시 윤회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속계를 지나 이미 법계로 들어가는 일주문을 통과했는데 왜 또다시 윤회의 사슬 속으로 들어온 것일까. 진정한 그 의미는 무엇일까? 문을 통과하자 해운루(海運樓)가 있고 그 뒤로 34년 전 화재로 불탔다가 다시 복원된 보광명전(寶光明殿)이 있었다. 법당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서방극락정토의 주불인 아미타불과 동방유리광세계의 주불인 약사불이 회원들을 맞이했다. 

우리 회원들은 불볕더위 속에 기도처를 잡고 육법공양, 천수경과 사경, 안심법문, 나를 찾는 108참회기도를 여법하게 봉행했다. 

그리고 선묵혜자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날씨가 정말 덥지만 소백산 용문사에 오니 어때요? 가만히 귀를 열고 들어보세요.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바람소리 새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죠, 좋아요. 안 좋아요 따로 휴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바로 이곳이 기도처이자 휴식처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누구를 친견하러 왔습니까. <화엄경> 입법계품의 29번째 선지식인 정취보살님을 보러 왔죠. 눈에 보이는 산과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가 정취보살님이요. 옆에 있는 도반이 바로 정취보살님입니다. 그런데 정취보살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리석은 중생들을 해탈과 극락으로 빨리 들어서게 한다는 보살입니다. 선재동자에게 정취보살님이 일러준 법문은 무엇일까요. 이 보살님의 다른 명호는 무이행보살(無二行菩薩)입니다. 즉 성불을 위해서는 오직 한 길만을 간다는 뜻인데 이것이 선재동자에게 일러준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성불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도도 했다가 안 했다가 순례도 왔다가 안 갔다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불도 가피도 복도 오직 부처님만을 믿고 가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오늘 여러분들은 소백산 용문사에 와서 이를 진실로 깨닫기 바랍니다.” 

선묵혜자스님의 법문이 끝난 후 주지 청안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대승적 보살정신으로 53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정진하시는 선묵혜자 큰스님과 순례단 여러분! 반갑습니다.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때 두운 조사에 의해 창건된 이래 수많은 대덕들이 수행한 영남제일 강원으로서 그동안 많은 불교인재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현재 우리 용문사는 20여 년 전부터 시작한 대작불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고 ‘상구보리하화중생’을 모토로 시대에 걸 맞는 템플스테이와 어린이 여름불교학교, 사찰음식 강좌, 대중법회 등을 통해 소통과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자비와 지혜의 종교입니다. 공덕을 쌓아 행복을 나누는 것이 자비입니다. 선재동자가 실천한 구법순례를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성불의 인연을 얻으시고, 나아가서는 이 땅에 불국토를 이루는 초석이 되시기를 저는 서원합니다. 소백산 용문사 순례를 위해 애쓰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53기도도량 순례단의 발전과 구법신행에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가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우리 회원들은 용문사 순례를 봉행한 뒤 기와불사와 직거래장터, 국군장병 초코파이보시, 소년소녀가장 장학금, 108약사여래 보시금 수여행사도 가졌다.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 반배부터…

 산사순례 중요 예절 

자연의 ‘발성법(發聲法)’은 ‘무념무심(無念無心)’이다. 진리를 그냥 드러내고만 있을 뿐, 그저 침묵하기만 한다. 그 속에서 사람은 진리를 배운다. 봄이면 잎이 피고, 여름이면 짙푸르고 가을이면 남김없이 자신의 몸을 지우는 잎, 겨울이면 새로운 잎을 틔우기 위해 인내하는 나무는 이렇듯 자연은 진리 그 자체이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연은 많은 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지만 오욕(五慾)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때문에 ‘53기도도량 순례’는 부처님과 자연의 진리를 찾기 위한 하나의 여정(旅程)인 것이다.

부처님의 경전인 <유교경>에 보면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으나 얕은 물은 졸졸 소리가 나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조용하며 편안함과 즐거움이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불안하고 변덕스럽다. 지혜로운 이는 항상 감사할 줄 알고 스스로를 살펴서 지족을 알아 즐기는 참된 재산을 가진 부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지혜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경구(警句)이다.

따라서 우리 회원들이 53기도도량 순례 때 반드시 지녀야 할 몇 가지의 마음가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사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전각은 산사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은 속계(俗界))와 법계(法界)의 경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문(門)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일주문을 통과하는 것은,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산사를 찾을 때 반드시 일주문을 통과하여 절로 들어서는 것이 좋다.

절 밖의 세상은 인간의 ‘오욕’으로 인해 번뇌가 끊임없이 끓는 곳이요, 절 안의 세상은 깨달음이 있는 곳이므로 무엇보다도 사찰을 찾는 불자들은 경건해야 한다. 또한 사찰 안팎에서 스님들을 만났을 때는 두 손을 정갈하게 모으고 가볍게 목례를 해야 하며 법당 앞이나 탑전을 지날 때도 항상 기도하는 마음자세를 지녀야만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먼저 갖추는 것이 산사순례의 시작이다. 이렇듯 불가의 법도(法道)는 매우 엄격하다.

그 다음에 지켜야 할 예절은 공양 시간이다. 스님들에게 있어 공양의 법도는 그 어떤 예절보다도 최상이다. 자리에 앉는 순서도 매우 엄격하며 상판과 하판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 말씀은 귀로 듣고 입에 음식을 담는 행위는 결코 불자로서 해야 할 예의가 아니다. 이를 바르게 지킬 때만이 내안의 부처를 찾을 수가 있으며 이와 달리 몸은 함부로 행동하고 마음만 앞선다면, 비록 많은 공덕을 쌓더라도 성불을 결코 이룰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예절을 알고만 있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불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선묵스님 

군종특별교구장ㆍ도안사 회주

[불교신문3414호/2018년8월11일자]

선묵 혜자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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