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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두의 고승전] <29> 영암당 임성대종사세 번 생각하고 한마디 하라…‘종무행정 대가’

 

팔만대장경 정대불사 창안 
해인사, 오늘날까지 이어와 
운허스님 자운스님과 함께 
강원 개설해 승가교육 중흥

1979년 동국역경원장 취임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설립
종단 3대 지표 기틀도 다져

공금·사비…옷엔 주머니 둘
출납장부도 사중 것, 개인 것 
철저한 ‘공사구분’ 일화 유명
삼보정재 수호 정신 ‘귀감’

농지환수 대법 판결 이끌어 
전국사찰 농지 되찾는데 공헌
지금의 봉은사 토지 대부분 
주지 재임 당시 매입한 것… 

조계종 원로의장, 총무원장,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한 영암스님은 시은(施恩)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실천한 ‘불교계의 청백리(淸白吏)’였다.
■ 도움말 : 도성스님(부산 태종사) 혜총스님(부산 감로사) 
■ 자     료 : 합천 해인사 영암당 임성대종사 비문, 서울 봉은사 영암당 임성대종사 비문,
봉은사 사지(寺誌,1997년 사찰문화재연구원 刊) 

영암당(暎巖堂) 임성(任性, 1907~ 1987)대종사는 평생토록 수행정진과 부처님을 받들고 가람을 수호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중생제도와 종단의 안정을 통한 불교발전에 헌신한 스님은 공사(公私)의 구별이 엄격하고 청렴결백한 생활로 불교계의 귀감이 되고 있다. 

스님의 일생은 당신의 좌우명인 십부지(十不知 : 모르는 것 열 가지)에서 엿볼 수 있다. 간식 차 과일 떡 낮잠 구경 여행 화초 서화 골동 등을 모르고 살았다. 어찌 그리 살 수 있나 싶지만 당신은 그렇게 살았다. 해인사 주지, 총무원장, 중앙종회 의장, 원로회의 의장, 동국대 이사장 등 종단의 중책을 역임한 스님은 당신이 맡은 일은 그 책임을 완수하는 철저한 성정을 지녔다. 해인총림 해인사 총무 시절 ‘팔만대장경 정대불사(頂戴佛事)를 창안, 오늘에까지 이어 오고 있다. 가는 곳마다 사찰재산 보전과 망실재산 환수에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하여 사찰행정의 대가로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스님은 또한 범패에도 빼어나 정초기도 때나 초파일, 천도재 등에는 앞장서서 장중하고 청아한 음성으로 의식을 집전했다. 스님의 일처리를 일컫는 말에 삼사일언(三思一言)이 있다. 세 번 생각하고 한마디 하라는 뜻의 삼사일언은 입을 열기 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며 매사를 신중히 하라는 뜻이다. 

스님은 1907년 8월10일 경남 울산군 중남면 교동리에서 아버지 박석순(朴碩淳)씨와 어머니 임봉필(任奉必)여사의 3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스님의 본관은 밀양이며 본명은 기종(基宗), 법명은 임성, 영암은 법호이다. 

어려서는 사서삼경 등 유학(儒學)을 수학했다. 우연히 불서(佛書) 중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보다가 제행무상일체공(諸行無常一切空 :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즉시여래대원각(卽是如來大圓覺 :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이라는 구절에 발심, 출가했다. 

1924년 통도사 주청담(朱淸潭)스님에게 나아가 출가하고 구하당(九河堂) 천보(天輔)화상에게서 사미계를 받아 득도(得度)했다. 1930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마치고 1933년 월정사에서 방한암(方漢岩)스님으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퇴락한 울진 불영사(佛影寺)의 주지를 맡아 가람을 중수했고 청담, 자운스님 등과 함께 3년 결사 하고 오후불식 등으로 천일정진을 성취했다. 

1938년 월정사 재무에 취임, 일제의 수탈로부터 사찰림을 수호했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총무를 맡아 광복 후의 혼란 속에서 본사로서의 사격(寺格)을 갖추는 데 공헌했다. 1952년 울진 동림사(東林寺)와 1958년 울산 해남사(海南寺), 백양사(白陽寺) 포교사에 취임했다. 

불교정화 이후에는 통도사 총무를 역임했으며 운허스님 자운스님과 함께 해인사에 강원을 개설하여 교육을 중흥했다. 1955년과 1960년 두 차례에 걸쳐 해인사 총무에 취임했다. 정화이념의 구현에 힘쓰는 한편 분배농지 환수의 대법원 판결을 받아 잃었던 농지를 되찾았다. 이 판례를 근거로 전국 사찰은 분배된 농지를 되찾게 되었다. 또한 전임 주지의 거액 부채를 청산했다. 해인대학에 무상으로 양도했던 해인사의 임야와 농지를 반환받았다. 

1964년 감찰원장, 1965년 해인사 주지, 1967년 총무원장, 동국대 이사장, 1974년 중앙종회 의장, 1975년 봉은사 주지, 총무원장(재임) 1976년 감찰원장(재임) 1978년 원로회의 의장에 추대됐다. 1979년 동국학원 이사장(재임) 1980년 정화중흥회 의장에 추대됐다. 

1984년 동국대로부터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79년 동국역경원장에 취임하여 세연이 다하기까지 재임, 역경원의 숙원이었던 재단법인 동국역경사업진흥회를 설립하여 종단의 3대사업의 하나인 역경불사가 길이 지속되도록 기틀을 다졌다. 영암스님은 봉은사의 오늘이 있도록 크게 헌신했다. 1975년 스님이 주지를 맡은 이 무렵은 봉은사 주변에 도시개발 붐이 한창 일면서 절의 대부분 토지를 잃게 되는 위기에 처했었다. 스님은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노력하여 잃었던 토지를 되찾아 왔다. 현재 등록된 소유 토지 1만9700여 평 가운데 대부분은 스님에 의해 매입된 땅이다. 

영암스님의 사찰재산과 가람수호정신은 숱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1940년대 스님이 월정사에 머무를 때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뺏긴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우리나라 산림을 마구 황폐화시켰다. 월정사 산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벌목꾼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오대산으로 나무를 베러왔다. 스님은 산중 대중을 이끌고 산판에 드러누워 벌목꾼들의 작업을 막았다. 그러고는 총독부 관리들을 찾아가 담판, 결국 벌목허가를 취소케 했다. 

스님의 공사(公私)구분에 철저한 일화도 유명하다. 스님은 주머니 둘 달린 옷 오른쪽 주머니에는 공금을, 왼쪽 주머니에는 사비(私費)를 넣고 다녔으며 그 쓰임은 철저했다. 언젠가는 개인 일로 강릉에 갔다가 돈이 떨어지자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까지 걸어간 일도 있었단다. 

스님이 해인사에 살 때다. ‘소임자는 밤에 잘 때는 방문을 꼭 잠그고 자라’고 했다. 도둑이 많던 시절이라 만에 하나라도 도둑의 침입으로 공금이 털릴 경우엔 사중(寺中)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기 마련이니까 미리 챙기고 조심토록 일러준 것이다. 

설사 친한 사람이라도 밤중에 찾아오면 방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견물생심(見物生心)으로 나쁜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혹 친한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방안에 있는 기척을 내지 말고 스스로 물러가도록 그리 했다고 한다. 밤중에 소변보러 밖에 나가는 것도 가지 않고 방안에 요강을 두고 밤을 지냈다. 사중재산을 관리하는 소임자의 자세를 경책하는 일화다. 

스님은 또한 해인사에 축구장을 만들어 학인들의 체력향상을 도왔다. 절집에 웬 축구장이냐며 못 마땅히 여기는 스님들도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앉아서 공부하는 스님들이 산불이 나면 무슨 힘으로 산을 오르내릴 거냐. 다리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흰 눈이 내린 운동장에서 공을 잡으려고 다리를 뻗어 올린 무비스님의 멋진 포즈(?)가 관조스님의 사진집에서 실려 있어 옛 추억으로 남아있다. 

공사가 철저한 영암스님의 일화는 해인사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 호롱불시대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지관스님이 밤 9시 넘어 남들이 잠잘 때에도 경서를 보느라 호롱불을 켰다. 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담요로 문을 가리고. 그러나 영암스님은 호롱불 기름 값을 내라고 했다. 영암스님의 기름 값 챙기기는 지관스님만이 아니었다. 다른 스님도 밤중에 사사로이 불을 켜면 기름 값을 꼭 내도록 했다. 

영암스님의 출납장부가 둘이라는 얘기도 유명하다. 하나는 사중 출납부이고 하나는 개인출납부다. 스님의 장부가 둘이라 하니 혹여 비자금 마련을 위한 것이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총무원장 시절, 스님에게 재일교포 신도가 차를 한 대 시주했다. 어려웠던 시절 총무원장이라 해서 전용차는 생각도 못 할 때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차 한 대를 보낸 것이다. 영암스님은 이를 거절했다. 그때의 말씀이 웃다가도 뒤통수를 멍하게 만드는 말씀이다. “그 차를 총무원장이 타고 다니면 조계사 주지가 ‘스님, 그 차 저도 좀 쓰게 해 주십시오’하면 거절 할 수 없잖아. 그러면 조계사 원주가 ‘스님, 장 볼일이 있는데 차 좀 쓰면 안 되겠습니까’하면 쓰라고 해야지. 그리되면 그 차가 어디 원장인 나만 타고 다니는 거야? 미나리 콩나물 사과 수박 떡 싣고 다니게 되지 않겠어. 콩나물 미나리 차 그거 돌려보내!” 

영암스님은 1987년 6월3일(음력5월7일) 오전 7시40분 봉은사에서 세연을 다했다. 법랍64년, 세수81세. 

법신본무생(法身本無生) 

사대원무실(四大元無實) 

색공무이도(色空無二道) 

청풍자거래(淸風自去來). 

스님의 임종게다. 스님의 영결식은 6월7일 원로회의장으로 봉은사에서 다비는 봉선사(奉先寺)에서 거행, 사리 17과가 나왔다. 해인사 길상암에 사리부도와 행적비가 있고 봉은사에도 부도와 탑비가 세워졌다. 

[불교신문3410호/2018년7월21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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