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학술세미나 열고 화엄석경 연구 및 보존관리 방안 모색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화엄사 화엄셕경 연구 및 보존관리 방안 학술세미나

보물 1040호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돌에 60권 <화엄경>을 새겼는데 지금은 파손돼 1만 4000여 점 편들로만 남아 있다. 조각들로 전해지는 화엄석경을 어떻게 연구하고 보존 관리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조계종 제19교구본사 화엄사(주지 덕문스님)는 오늘(6월29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학술세미나를 열고, 화엄석경 복원 및 활용방안을 살펴봤다.

이날 최연식 동국대 교수는 화엄사 창건의 역사적 배경을 검토했다. 화엄사는 신라 화엄십찰 중 하나이자 신라시대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졌지만, 창건의 역사적 배경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최연식 교수는 1970년대 말 밝혀진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사경본을 토대로 화엄사 창건주체와 창건시기를 추정했다. 

그는 "<동국여지승람>에는 연기스님이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고, 백제 법왕 때 인도승려 연기가 창건했다는 기록도 있다. 구례읍속지 등 지방읍지에는 신라 진흥왕 5년 연기스님이 창건하고 자장스님이 중창했다고 전해진다"며 "실제 연기법사가 화엄사 창건을 주도했던 인물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대각국사 의천스님도 화엄사에서 연기조사 진영을 보고 조사를 추모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대개 사찰에 진영이 모셔진 스님이 사찰 개창자였던 것을 미뤄보아, 화엄사 창건한 스님이 연기조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창건시기이다. '발원문'에 따르면, 황룡사 연기법사가 아버지를 위해 <화엄경> 사경을 발원해 755년 2월24일 완성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를 토대로 연기법사가 755년 당시에 실존했던 인물임이 확인됐다. 필사작업은 전라도 사람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필사에 필요한 종이를 만들고 경전 본문을 쓰는 1차 작업은 전라도 지역 사람들이 담당했고, 본문이 완성된 후 경심(經心)을 만들고 변상도를 그리고, 표지 제목을 쓰는 등 장황(裝潢)은 경주사람들이 담당했다. 최 교수는 "난이도 있는 장황기술은 수도 경주에 있는 사람 초청해서 담당시켰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사경작업이 사찰 즉 화엄사에서 진행됐음을 추정했다. "종이를 만들고, 경문을 필사해 장황하는 작업이 동일한 장소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며 "법사들이 범패하고, 기악인들이 기악하는 것이나 필사자들이 재식, 즉 오후불식을 하도록 했다는 게 사찰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토대로 최 교수는 화엄사가 늦어도 <화엄경>을 사경했던 755년 이전에 창건됐다고 봤다. 중국의 예를 들어 보면, 사경하기 위해 닥나무를 기르면 3년간 기른다고 한다. 화엄경사경 이전에 석경을 벽면에 장식했다고 보면 늦어도 750년 전에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다만 발원문에 화엄사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황룡사 연기법사라 기록된 것에 대해서 "화엄사가 아직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이전 단계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신라나 고려시대 사찰은 국가의 인정을 받아야 공식사찰이 됐다. 국가인정을 받기 전에는 개인의 사적인 절로, 국가의 공식적 관리와 지원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연기법사가 창건한 사찰이 화엄사라는 정식 이름을 얻고 국가가 지원하는 주요 사찰로 인정된 것은 발원문이 작성된 755년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며 "화엄사가 국가에 의해 공인된 이후에 연기법사의 소속도 황룡사에서 화엄사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최 교수는 화엄경 사경을 하고 화엄사 창건하는 데 있어 유력한 귀족들의 후원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후원자를 추정했다. 발원문에 성단월신라국경사(成檀越新羅國京師)□□'라를 기록에 주목했다. 

발원문을 보면 종이를 만들기 위해 닥나무를 기르는 것부터 필사와 장황작업,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례를 행하며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인력과 비용이 투입된 것을 알 수 있다. 최 교수는 "이정도 작업을 후원할 수 있는 단월이라면 상당한 재력을 갖춘 인물로, 사경 외에 석경제작과 불전건립을 후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발원문 기록에 의하면 시주자는 경주사람으로, 남아 있는 글자로 미뤄보아 '順□'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세기 전반에 활동한 인물 중 첫 글자가 순인 인물로 성덕왕과 효성왕의 장인 김순원이나 경덕왕의 장인 김순정 등이 있는데 확인할 순 없지만 같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혈연관계에 있던 인물일 가능성이 도 배제할 수 없다"며 "통일신라시대 귀족들이 자신의 전장(田莊)을 희사해 사찰을 짓던 것을 고려하면 현재 화엄사 지역은 단월인 '順□'의 전장이 있던 곳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화엄사가 창건된 750년경 무렵 통일신라 불교계에서는 <화엄경>이 중시된다. <삼국유사> 의해 '현유가해화엄(賢瑜珈海華嚴)'조에 따르면 753년 가뭄이 심해서 태현스님이 <금광명경>을 설해 비가 내렸다. 이듬해 또 가뭄이 들어 법해스님이 <화엄경>을 설했더니 동해바다가 넘쳤다고 전한다. 

이는 <금광명경>으로 대표되는 사상이 <화엄경>으로 교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법상종 계통의 위상이 낮아지고 대신 화엄경 계통의 불교가 새롭게 대두되는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화엄사를 창건해 <화엄경>을 사경하고 석경을 봉안하는 것 또한 이런불교계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세덕 경주대 교수는 '화엄사 각황전의 복원적 관점에서 본 화엄석경 보호각의 방향성'에 대해 발표했다. 화엄석경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화엄사 장육전(현 각황전) 벽체를 장엄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훼손됐고, 6.25 전쟁 당시 석경을 담았던 상자가 포탄을 맞으면서 현재 조각으로만 전해진다.

지금 각황전은 1702년 재건된 것으로, 이 건물을 일제강점기 때 해체수리를 할 때 도면이 나왔다. 장육전 평면도로 보이는데 정면 7칸 측면 5칸 구조다. 내진과 외진의 두 개의 벽체가 있었다는 게 확인된다. 두 개의 벽체를 가진 건물은 삼국시대에 등장했다. 포항 법광사지 금당지, 합천 영암사지 금당지, 원주 법천사지 금당지에도 이런 구조가 나온다. 

화엄석경은 내진 별체를 구성했다는 흔적이 초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귀기둥 초석에 'ㄱ'자 방향으로, 일반초석은 'ㅡ'자 방향으로 홈이 파여 있다"며 "화강암은 가공하기 어려운 돌로, 홈을 팠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 화엄석경을 꽂은 흔적임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화엄사 화엄셕경 연구 및 보존관리 방안 학술세미나에서 토론하는 모습. 이날 좌장은 최응천 동국대 교수가 맡았다.

화엄사 각황전은 내부에서 보여주는 통일신라 가구식 기단은 초기 장육전을 창건할 때 남아 있는 요소다. 오세덕 교수는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가구식 기단을 상세히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기단의 가장 큰 특징을 보면, 면석에 우주와 탱주를 별석으로 끼워 넣은 것이다. 오 교수는 "불국사를 보면 면석에 우주와 탱주를 새기는데, 그 앞 단계에서는 면석에 우주와 탱주를 직접 넣는다"며 "이런 양식은 통일기에 잠깐 등장하는데 별석이 있다는 점에서 화엄사 창건시기를 우리 생각보다 이전으로 볼 수 있다"고 추정했다.

또 화엄석경 건물을 만들 때 이미 100% 계획을 하고, 석경이 들어가는 위치도 확정했을 것으로 봤다. "통일신라시대 전탑을 보면 외부에 글자가 기록되는데, 석경에도 이런 흔적이 있다"며 "2~8cm 두께인데 두꺼운 게 밑에, 얇은 석경이 위에 올라갔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화엄석경을 어떻게 쌓았을까. 오 교수는 우리가 화엄석경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배치했을 것이란 점에 무게를 두고 화엄석경 높이를 고민했다. 해인사 판전을 떠올리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 있고, 일본 법륜사 오층탑을 보면 내부 창을 둬서 불상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화엄사 장육전도 비슷한 창호를 갖추고 있어야 화엄석경을 볼 수 있다. 오 교수는 내진에 석경을 3m 정도 높이로 쌓고 그 위에 창문을 내고, 외진에도 창을 내 석경과 불상을 볼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화엄석경을 직접적으로 쌓지 않은 것으로 봤다. 통일기 전후로 장육전을 만들고 임진왜란까지 있었다면 800년 이상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0년 주기로 보수를 감안하고, 지진에 훼손되지 않으려면 벽체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 

오 교수는 석굴암 내 팔부중과 사천왕상 크기가 3m 내외인 점을 감안해 장육전 화엄석경 높이 역시 3m 정도로 봤다. 또 "석경판 6장을 설치해 벽면을 구성하고, 경판 중간중간 사이에 일반벽체의 벽선처럼 나무부재 완충재를 반드시 넣어야 한다"며 "화엄석경 6장을 그대로 쌓아올리면 외부 흔들림이나 충격에도 벽체가 산산조각 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목재 벽선부재가 삽입됐을 것"이란 의견을 밝혔다.

화엄석경을 보존 관리할 성보박물관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화엄석경을 복원, 전시, 수장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서찰 성보박물관보다 규모가 커야 하고 화엄석경을 복원하면 지금보다 더 큰 수장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당히 넓은 규모의 복원연구실도 반드시 갖춰야 한다. 벽체를 쌓아 하중을 버티는 실험 등을 할 수도 있고 복원에 대한 세부적인 모습을 고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 3m 이상의 벽면이 유물정리 공간에 마련돼 있어야 한다.

오 교수는 "화엄석경이 많이 훼손돼 복원과정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계획보고서에는 예산, 인력, 시설 등이 모두 망라돼야 한다"며 "장육전과 화엄석경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해 일반인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는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미영 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화엄석경 편들에 나타난 복원의 단서와 문제점 고찰'을 주제로 발표했다. 1만 여개가 넘는 편들로 전해지는 화엄석경은 본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남은 편들로 모습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조 연구위원은 화엄석경의 서풍이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1축과 유사하고, 경주 칠불암 '금강석경'의 서풍과 거의 일치해 동일한 집단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경할 때 경문 위쪽에 가로로 긋는 천두선, 아래쪽 가로로 긋는 지각선, 위아래 천지연과 세로로 행간을 구획하는 계선을 그어 경문을 서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엄석경에도 천지선과 계선이 있어, 천지선과 계선을 먼저 작업한 후 경문과 변상 작업이 이뤄졌을 것이다. 조 연구위원은 천지선을 기준으로 화엄석경 복원을 시도했다. 그 결과 <화엄석경>은 권(券)이 아닌 품(品)이 중심이 돼 서사됐음을 밝혔다. "1품과 2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앞품이 끝나고 행을 바꾸어 품수제를 서사하고 있고, 몇몇 품들은 품수제를 한 행으로 배치하고 경문은 행을 바꾸어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뒤쪽으로 갈수록 구성이 여유가 있어 장행이 끝나고 빈 공간이 있어도 행을 바꿔 게송을 시작하고 게송이 끝난 후 공간이 비어있어도 행을 바꾸어 장행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석경에는 변상도 흔적도 확인된다. 조 연구위원은 "화엄석경의 저본인 화엄경 지본은 7처 8회 34품으로 이뤄져 있다"며 "변상도가 확인된 부분은 5곳으로 모두 설법장소가 바뀌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9품의 시작부분은 보광법당회가 끝나고 도리천회가 시작되는 곳이고, 15품은 설법장소가 도리천에서 야마천궁으로 바뀌는 부분이다. 이를 토대로 "화엄석경 변상도 위치를 품과 품사이로 설법장소가 바뀌는 곳 즉 각 회의 시작부분인 8곳에 변상도가 있었다"고 추측했다.

또 석경에 남은 고정장치의 흔적도 공개했다. "석경에 구멍이 남아 있는데 대개 천두선 위에 구멍이 뚫려 있다. 구멍 뚫린 편에는 천두선 위에 한 줄의 선이 더 그어져 있다" 구멍이 남아 있는 조각들을 가장 윗부분의 편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위쪽의 네모난 홈이 확인되는데, 홈을 파기 위해 줄을 그어놓은 것도 확인할 수 있다"며 "분명 일부러 파 놓은 홈으로, 돌과 돌 사이를 나무를 이용해 연결한 흔적"이라고 밝혔다.

이밖에도 이날 세미나에서는 김복순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가 '신라 화엄종과 화엄사 화엄석경의 조성시기'에 대해 발표했으며,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이 '화엄사 석경의 복원 및 활용'에 대해 살펴봤다. 또 최원호 문화유산융합 기술연구소장은 'ICT 기술을 이용한 화엄석경 복원 및 활용방안'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은 “오늘 시작이라는 것을 느꼈다. 화엄석경 복원과 보존관리를 위한 논의를 꾸준히 진행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석경은 건축, 서예, 석각 등 문화재 종합유산으로 보존활용하기 위한 노력을 후대에까지 이어가야 할 것 같다. 화엄사와 문화재청, 학자들도 함께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왼쪽에서 두번째)을 비롯해 많은 스님들이 참석했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화엄사 화엄셕경 연구 및 보존관리 방안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를 경청하는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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