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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실에서 법을 청하다] 조계종 원로의원 법타스님“승복 처음 본 북한 사람이 ‘역사학자냐’ 묻더라”
조계종 원로의원 법타스님은 “통일운동은 특수한 한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며 “일제 강점기 때 모두가 독립운동을 염원했던 것처럼 함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형주 기자

“꽉 막혔던 민간 교류협력사업
활짝 열릴 것…불교계 철저히
준비해 대북교류 주도해야”

불교가 중생 아픔을 외면하면
결국 사회로부터 버림받게 돼
정의 실현 통일운동 앞장서
불교 가르침 존재가치 알려야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을 이루자.” 조계종 원로의원 법타스님에게 전화를 걸자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멜로디의 핸드폰 컬러링이 울려 퍼졌다. 긴 세월 통일운동에 앞장서온 원로 스님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법타스님은 냉전시대 북한을 방문했을 정도로 이 분야 선구자다. 그만큼 남북 교류사에 스님이 남긴 발자취도 크다. 30년 전 이미 북측으로부터 비자를 받아 방북 길에 오르기도 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 불어온 평화의 바람 앞에 지난 5월14일 서울 조계사에서 만난 법타스님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법타스님은 “기쁘기 한량없다. 분단 70년 역사의 한이 평화로 바뀌고 나아가 평화통일도 가시권으로 들어온 상황이다. 그동안 남북관계 악화로 10여 년 가까이 중단됐던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도 활짝 열릴 분위기다. 불교계도 철저히 준비해 대북교류 사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법타스님은 지난 1992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를 결성하고 남북교류에 열정을 바쳤다. 사리원에 금강국수공장 설립 및 식량지원과 금강빵공장을 설립하는 등 남북 교류에 앞장서 왔다. 금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불변의 진리를 뜻하는 ‘금강반야바라밀경’처럼, 금강과 같은 지혜로 번뇌를 없앤다는 ‘금강력사’ 처럼, 남북관계도 변치 않길 바라는 스님 염원이 담겨있다.

199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남북불교교류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와 금강산문화유적복구협약을 맺고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평양 법운암 단청과 삼존불 개금, 사리원 성불사 단청 및 삼존불 개금 등 북한 사찰과 불교문화재 보존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20여 년 간 불교계 성직자로서 남북교류활동에 많은 역할을 해 온 법타스님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7월 미주종교평화협의회로부터 ‘종교평화상’을 수상했다.

법타스님은 “6·15 남북공동행사가 열릴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앞으로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 1998년도에 가동했던 국수공장 현황을 파악하고, 조선불교도련맹과 논의해 현실적으로 절실히 요구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다”고 밝혔다.

방북 당시 겪었던 경험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들려줬다. “1989년 6월26일 평양으로 들어가 25일 동안 북한에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가 있을 때였는데 대한민국 여권을 들고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LA총영사관에 신고하고 혼자 출발해 서울과 홍콩을 거쳐 중국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들어갔다. 당연히 스님이니까 승복을 입고 있었다. 북한 사람이 복장을 보고 조선옷을 입고 있으니 처음엔 역사학자냐고 물었다. 그래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니 ‘중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법타스님은 이날 대북교류협력 활동을 하며 겪었던 고초도 털어놓았다. 심지어 종북으로 몰려 구금되기까지 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신공안 정국 때였다. 1994년 7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했다. 그때 (정치권이) 북풍을 이용했다. 조국평화통일불교협의회를 결성하고 활동하고 있을 때였는데, ‘주체사상과 불교’라는 세미나를 빌미로 하루아침에 저하고 이지범 씨를 잡아갔다. 죽도록 두들겨 맞고 잠도 재우지 않고 고문당했다. 교도소에서 105일간 구금돼 있었는데 국가보안법 위반 딱지가 대법원에 계류돼, 김대중 정권 때까지 6년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스님은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교도소를 ‘국립선방’으로 삼고 이뭐꼬 화두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때 일타스님이 원고지 7장에 걸쳐 보내온 편지가 큰 도움이 됐다. 편지를 받고 눈물도 펑펑 쏟았다. ‘좋은 선방에 갔으니 나오는 날까지 정진하라’는 내용이었다. 화탕지옥에 가까운 무더운 여름 좌복을 대신해 깔아놓은 종이박스가 흠뻑 젖을 때까지 참선정진에 매진했다. “국립선방에서 한 철 잘 났다”는 스님은 “그때 생각하면 지금 다니는 선방은 지상낙원”이라고 말했다.

법타스님의 은사 스님은 구한말에 태어나 조국 독립에 큰 힘을 보태고 청정승가 회복을 위해 불교정화 불사에 적극 나섰던 추담스님이다. 법타스님의 수행정진의 밑바탕에도 은사 스님 가르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던 은사 스님은 기개가 대단한 분이었다. 일본 순사들이 말을 타고 가면서 채찍으로 조선인들을 때리니까 종아리를 물었다고 한다. 스님은 항상 인간의 인성과 행동방침을 강조했다. 이 두 가지를 잘 챙기면서 언제나 역지사지 하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일에 있어서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면 그게 바로 평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종교인구 감소와 출가자 급감 등 한국불교를 둘러싼 과제가 적지 않다. 복잡한 난제지만 이날 법타스님이 내놓은 해답은 명쾌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요익중생(饒益衆生)에 더욱 앞장서야 한다고 피력했다. 불교가 중생의 아픔을 외면하면 결국 사회로부터 버림받게 된다고 했다. 법타스님은 “‘완성자’를 위해 전력투구를 한다 해도 그 한 사람이 만 중생을 제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며 “명목상의 수행일변도에서 벗어나 사회구제의 원력을 행동으로 적극 옮겨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경제정의와 사회정의 실현, 통일이라는 민족 하나 되기 운동에 소홀 한다면 사회도 우리 불교의 존재 가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의 사회화가 중요하다. 불교는 한국의 역사를 주도해 왔다. 과거 원효와 자장스님, 서산·사명대사와 같은 훌륭한 사표들은 또 얼마나 많았나. 불교는 국민과 국가와 항상 함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자기완성과 사회완성은 함께 가는 것”이라며 불교 사회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법타스님은 “통일운동은 특수한 한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다”며 “일제 강점기 때 모두가 독립운동을 염원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타스님은…

추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1967년 1월 법주사에서 추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7년 4월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법타스님은 특히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제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 북한을 오가며 식량난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직접 본 스님은 지난 30여 년 동안 북한에 옷과 밀가루 등을 전달하며 통일운동을 펼쳐왔다. 지난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동국대 정각원장을 맡아 동국인들의 정신적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며 학교 화합과 사기진작에 힘쓰기도 했다.

지난 34대 집행부 때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소임을 보며 꽉 막혀 있는 남북관계 속에서도 종단 차원에서 대화와 협력을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스님은 최근 조계종 최고법계인 대종사 법계에 올랐으며 총무원 총무부장, 제10교구본사 은해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홍다영 기자  hong12@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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