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산조 도윤선사가 주석했던 화순 쌍봉사.

역사학자 토인비(Toynbee, 1889~ 1975)는 21세기 역사학자들이 20세기에 일어난 세계사적인 큰 사건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나 공해로 인한 인류의 유전형질변이가 아니라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를 들었다고 했다. 불교학 가운데 특히 선사상은 불교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선(禪)은 인도와 다르게 중국화·한국화 된 선으로 탈바꿈됐다. 종교도 그 나라 문화와 융합되는 것이고, 그 나라 사람들의 코드와 맞아야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본다. 수년전 우연히 기사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다.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초기불교 위빠사나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며 명상자가 많지만, 앞으로는 대승불교 초기경전이나 간화선으로 관심이 옮겨갈 수도 있다”는 서양학자들의 전망이다. 모든 것이 무상하거니, 변화란 반드시 있는 것이요, 한류 문화가 전 세계에 꽃피는 것처럼 한류 불교도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때를 위해 한국의 불교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입당 구법…개산조 도윤의 행적

철감 도윤(徹鑑道允, 798˜868) 선사는 도균(道均), 도운(道雲)이라고도 하며, 철감(徹鑑)은 시호이다. 속성은 박씨로 한주(漢州, 현 서울) 출생이다. 18세에 승려가 되고자 김제 귀신사(鬼神寺)에 들어가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원돈(圓頓)의 이치가 어찌 심인(心印)의 묘용(妙用)과 같을 것인가’라고 탄식, 화엄경보다 더 중요한 수행에 의지를 품고 입당(入唐)을 결심한다. 

도윤선사는 헌덕왕 17년(825년)에 당나라로 가서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년) 문하에서 수행한 뒤, 남전의 법을 받았다. 남전은 앞 원고 ‘달맞이’ 내용에서 한번 거론했던 선사이다. 마치 안회가 공자(孔子)의 총애를 받은 것과 같이 남전도 스승 마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남전은 마조가 생존했을 당시부터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 마조의 선법을 이으면서도 독특한 선법을 형성하고 있어 초기에는 임제계로부터 조동계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선사이다. 남전과 관련된 많은 기연(機緣)이 공안이나 화두화 돼 있다. 제자로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화두로 널리 알려진 장사 경잠(長沙景岑, ?˜868년)과 무자화두로 알려진 조주(趙州, 778˜897년) 등이 있다. 

도윤과 함께 수행했던 중국의 한 승려가 도윤에게 이런 말을 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우리 종파의 법인(法印)이 모두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 도윤은 당나라에서 22년간을 머문 뒤, 847년(문성왕 8년)에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물렀다. 이후 전라도 능주(綾州, 현 화순)의 쌍봉사(雙峰寺)로 옮겨가 크게 선법을 펼쳤다. 이 무렵 경문왕(861〜874년 재위)이 선사에게 귀의했다. 선사는 868년(경문왕 8년) 71세에 쌍봉사에서 입적했다. 선사의 부도가 현재 쌍봉사에 있다. 도윤의 제자 절중(折中)의 탑비 내용을 통해 사자산문(獅子山門)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강산 도윤화상이 오랫동안 중국에 있다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선문(禪門)에 나아가 공경히 오체투지를 하였다.…도윤은 남전에게 법을 부촉 받았다. 남전은 마조에게서 법을 이었고 마조는 회양에게서 법을 받았으며 회양은 혜능의 제자이니, 우리 도윤화상의 덕이 높고 뛰어나다.” 

‘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 비문의 내용을 미루어 정리해보면 혜능, 남악회양, 마조, 남전보원, 도윤, 절중에 이르기까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맥임을 알 수 있다. 

도윤선사탑(오른쪽, 국보57호).

2세 관동지방서 크게 발전 

‘사자산문’은 도윤의 제자인 징효 절중(澄曉折中, 826˜900년)에 의해 크게 번창했다. 곧 관동지방에서 발전한 산문은 사굴산문과 사자산문인데, 사자산문의 2세 절중에 의해 관동지방에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절중은 7세에 출가해 오관사(五冠寺) 진전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15세에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했다. 화엄을 공부하면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십현연기설(十玄緣起說)에 깊은 뜻을 탐구했다. 19세에 청양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 무렵, 남전의 법을 받고 돌아온 도윤이 금강산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수행했고, 이후 자인(慈仁)선사 문하에서 16년 동안 공부했다. 절중선사는 국통(國統) 위공(威公)이 서울과 가까운 곡산사(谷山寺)로 천거하자, 사양했다. 이 무렵, 절중은 석운스님의 청으로 강원도 영월 흥녕선원(興寧禪院, 현 법흥사)에 머물게 되면서, 헌강왕과 정강왕의 귀의를 받았다. 절중이 사자산문의 선풍을 이곳에서 부흥시키면서 학계에서는 사자산문이라고 했다. 

900년 74세 때, 선사께서 입적 때가 되어 문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계가 공(空)하고, 모든 인연이 전부 고요하다. 내 장차 떠나려고 하니, 그대들은 열심히 정진하여 선문을 수호하고 종지를 받들어 불조의 은혜를 갚도록 하라.” 선사의 시호는 징효, 탑호는 보인(寶印)이다. 탑과 비가 영월 법흥사에 모셔져 있다. 절중의 제자로는 경유(慶猷)·여종(如宗) 등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사자산문의 선풍이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과 봉림산문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해 선사들의 행적이나 선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하지만 선사들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사자산문은 화엄에 입각한 선사상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에 기반한 조사선 사상이 특징임을 알 수 있다. 도윤의 스승인 남전의 사상에 가장 두드러진 사상이 ‘평상심시도’이다. 제자 조주가 남전에게 “어떤 것이 도입니까?”하고 묻자, 선사는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대답했다. 이 내용은 자주 회자되는 내용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사자산문의 선은 당연히 평상심에 기반한 조사선 사상을 선양했을 것으로 본다. 

사자산문의 2조 절중의 행적에서는 ‘화엄사상과 선(禪)의 일치’를 엿볼 수 있다. 4법계설 중 마지막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십현연기설(十玄緣起說)인데, 절중은 이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깊이 궁구했다. 후대 선과 화엄의 교선일치적인 선풍을 전개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신라 산문 발달한 이유 

‘사자산문’을 널리 알린 2조 징효절중의 수행터전 영월 법흥사 산문

나말여초, 산문(山門)이 성립되는 데는 전반적으로 호족이나 왕권의 영향을 받았다. 이 점은 중국의 선종(조사선)이 발전했던 것과는 큰 차이다. 중국에서 선(禪)은 시골 변방에서 발전했다. 초조 달마˜3조 승찬 대에 이르기까지 선사들은 두타행자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8세기 중반 조사선이 발달했을 때도 선사들은 수도권과는 거리가 멀었고, 왕권이나 권력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당시 대표 선사인 마조(709˜788년)와 석두 희천(700˜791년)은 왕권 및 귀족적인 성향을 벗어나 시골(강서성과 호남성)에서 법을 펼쳤다. 이후 강서(江西, 마조 활동 지역)의 ‘강(江)’과 호남(湖南, 석두 활동 지역)의 ‘호(湖)’를 붙여 ‘강호’라는 말이 생겼다. 간혹 중국에서 무술 고수들의 모임에서 천하(天下)를 상징하는 단어로 쓰이는데, 원래는 선에서 시발된 것이다. 이 지명에 의해서 승려를 호칭할 때, 강호가 붙어 강호승(江湖僧), 강호중(江湖衆)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또한 결제 기간을 강호회(江湖會)라고 하며, 승려가 머무는 당우가 강호도량, 강호료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렇게 선에서 시작된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보인탑비(오른쪽, 보물612).

이와같이 중국에서는 선종이 발전할 때 귀족이나 왕권과 거리가 멀었던 반면, 신라에서의 선종 산문은 왕권이나 호족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당시 당나라와 신라의 불교사적, 시대적인 배경이 다른데서 오는 차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선이 풍요로운 시골의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지방 분권 지배자들의 코드에 부합됐다. 중국도 후대로 가면서 황제와 밀착했던 선사들에 의해 선사상이 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불교신문3390호/2018년5월5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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