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찾아온 구법승에게 차를 통해 건넨 ‘안심법문’

‘지금’ ‘현재’ 가장 괴롭고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곧 ‘수행’

어느 날 한국 스님과 함께 서울 인사동에 있는 전통찻집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찻집 주인이 내주는 차를 마시면서 한국 스님이 내게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한국에서 누군가 녹차를 마시는 것을 TV에서 보게 되면 저 사람은 불자인가”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만큼 한국에서 차(茶)는 절에서 스님들이 마시는 것으로 오랫동안 인식돼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중국에서 차의 기원은 사찰에서 스님들이 시작했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보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차와 관련된 불교적 선사의 가르침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한국에서 차가 불교적인 큰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듣고 조금 놀라웠습니다. 중국은 여러 지역에서 차를 생산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중국 전통문화 중에 차는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평범한 세속생활을 표현하는 말로 ‘시미유고장초다(柴米油鹽醬醋茶)’라는 구절을 사용하는데 이처럼 차를 간장, 소금, 쌀 등과 같이 생활필수품으로 여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차가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것을 보면 차는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먹는다는 표현을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불자들이 알다시피 선종의 선지식 조주선사(趙州禪師)의 ‘끽다거(喫茶去)’라는 화두에서 ‘끽’자가 바로 먹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중국 서안 법문사에서 근·현대에 발굴된 당나라 때의 황궁다구를 살펴보면 당나라 시대까지 중국차는 채소와 같은 음식이었고 ‘먹는다’고 표현돼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는 추위를 쫓아내고, 질병을 치유하고 또 허기를 채워주는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기근 시대에 차를 보시하는 것은 죽을 보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차는 허기를 채울 뿐만 아니라 질병도 치료하는 음식의 가치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조주선사의 ‘끽다거’를 다시 해석하자면 당시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불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당시 스님들은 모두 걸어 다니며 스승을 참배하고 법을 구했습니다. 때문에 먼 길을 걸어온 스님들이 조주선사 앞에 이르렀을 때는 배고프고, 목마르고, 때로는 추위로 몹시 피로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도(道)를 구하려 왔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것도 참으며 선사에게 “도는 무엇인가”를 물어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주선사는 이미 이런 사실을 알고, 현재 바로 해결해야할 문제는 심오하고 이론적인 불법이 아니라 몸을 보살펴 기운을 차려 건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몸은 번뇌의 근원이며 몸이 먼저 안온하게 돼야 마음도 평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나 한잔 마셔라”라며 몸을 먼저 편안하게 한 뒤 자동적으로 마음도 편안해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주선사의 ‘끽다거’는 차를 통해 선지식을 찾아 불법을 구하러 먼 길을 온 승려들에게 준 안심법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몸과 일상을 떠나 멀리서 배우거나 심오한 이론적인 것이 수행이 아니라 바로 ‘현재 그리고 지금’ 가장 괴로운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불교신문3386호/2018년4월21일자] 

명진(明臻)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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