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한 데 없으나 어디나 있고, 안 가는 데 없으나 가지 않나니, 

허공에 그린 그림 꿈에 보듯이 부처님의 몸도 이렇게 보라

(雖無所依無不住 雖無不至而不去 如空中夢所見 當於佛體如是觀). 

- <화엄경> ‘입법계품’ 중에서

시골 작은 목욕탕 양지 녘에는 냉이꽃이 필 모양이었다. 앙증맞은 봄까치꽃이야 벌써 맞선을 본 터였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쑥이 제법 자라 들깨가루가 아쉬운 일이었지만 올해는 바쁜 마음만 쑥쑥한 참이었다. 다행이 묘목시장에 들를 일이 생겨 살구나무, 포도나무, 구기자나무, 베리를 몇 그루 씩 사왔는데 심을 곳이 마뜩찮았다. 지나가는 할매 등이라도 빌릴 판이었는데 땅이 없어서가 아니라 햇볕 잘 드는 곳이 서러워서다. 살면서 가장 행복하다 생각되는 순간이 봄날 밖으로 쪼그려 앉아 봄볕 쬐는 일인데 묘목이 자라면 자리를 뺏기고 그늘이 질까 염려하여서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자릴 내주며 사는 일이 사는 보람이거니 싶어 삽을 들고 땅을 팠더랬는데 일찍 올라온 풀을 한 삽 뜨고는 또 망연하였다. 남의 자릴 뺏었던 건 내가 아니던가. 뒤엎어진 흙 한 삽에 터줏대감 머위 뿌리가 반 쯤 잘려 있었다.

[불교신문3385호/2018년4월18일자] 

 

도정스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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