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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10> 동리산문 혜철(惠徹)선사말 없는 가운데 법 펼친 ‘선교일치’ 통합사상 주창
  •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 승인 2018.04.13 17:38
  • 댓글 2

 

설함이 없는 가운데 설하고
법이 없는 가운데 법이 있는
무주상ㆍ공적 조사선 바탕

‘본래성불’ 입각 돈오사상
‘무설지설ㆍ무법지법’ 펼쳐 

스승 서당에게 ‘심인’ 얻고도
대장경 열람 ‘선교융합’ 지향 
곡성 동리산 태안사 산문 열어

문성왕 수시 자문 ‘적인’ 시호
제자 도선은 고려개국에 공헌  

혜철선사가 20여 년 간 머물며 ‘무설지설(無說之說) 무법지법(無法之法)’의 선풍을 일으킨 곡성 태안사는 동리산문의 근본도량으로 아직도 선사의 자취가 남아있다. 당대 유명세로 왕의 자문역이 되기도 하여 입적 후 ‘적인(寂忍)’이라는 시호와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는 탑호까지 받게 됐다. 사진 왼쪽부터 곡성 태안사 산문.

혜철(惠徹, 785˜861년)선사는 경주 사람으로 성은 박 씨이다. 10여 세에 출가하여 처음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을 배웠고, 22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화엄경>의 근본사상을 탐독한 뒤, 모르는 것을 묻고자 해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자 ‘본사(本師)의 가르침을 얻지 못하면 본사의 심법(心法)과 일치한 길을 열 수가 없구나’라고 탄식한 뒤, 헌덕왕 5년(814)에 입당(入唐)을 결심했다. 

당나라에 들어간 혜철은 서당 지장(735˜814년)을 만났다. 혜철이 서당 문하에 머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당에게서 법을 받았다. 혜철은 서당이 입적한 후에 서주(西州) 부사사에 머물며 3년가량 대장경을 간경했다. 혜철이 다른 선사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점이다. 전반적으로 당나라 때 마조의 제자들 중에는 강사 출신이 많았다. 강사 출신 마조의 제자들은 분주무업·남전·흥선유관·장경회휘·아호대의·양좌주 등인데, 모두 사교입선(捨敎入禪)했다. 이 점은 당시 불교사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시대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대로 혜철선사는 깨달음을 이루고도 대장경을 몇 년간 열람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에 비추어 수행하라’는 뜻으로 이를 ‘법경(法鏡)’이라고 하셨다. 혜철선사를 통해 한번쯤 법경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무설설 무법법' 사상

혜철은 여러 지역을 행각하며 수행하다가 문성왕 원년(839)에 귀국했다. 25년 만에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온 것이다. 혜철은 전라도 곡성군 동리산에서 태안사(泰安寺) 산문을 열고 선지를 베풀었다. 그런데 도량에 모기와 하루살이가 너무 많아 살기가 힘들었다. 이에 스님이 신력으로 벌레들을 재 너머로 쫓아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 재를 축맹치(逐峙) 혹은 축맹재라고 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문성왕(839˜856년 재위)은 혜철의 명성을 듣고, 신하를 보내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이나 중요한 방안을 물어보았다. 혜철선사는 태안사에서 20여 년간 법을 펴다 861년 77세로 입적했다. 시호는 적인(寂忍)이며, 자는 체공(體空), 탑호가 조륜청정(照輪淸淨)이다. 제자로는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이 있다. 

동리산문(桐裏山門) 혜철의 선사상 특징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동리산문의 선풍은 무설지설(無說之說) 무법지법(無法之法)이다. 설함이 없는 가운데 설하고, 법이 없는 가운데 법이 있는 무주상(無住相) 공(空)적인 조사선 사상이다. ‘대안사적인선사비명’에 혜철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혜철이 스승인 서당 지장을 만났을 때의 문답이다. 혜철은 서당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승은 동국에서 태어나 하늘과 땅에 길을 물어 먼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당나라에 와서 법을 듣기를 청합니다. 만일 훗날 ‘무설(無說)의 설(說)’ ‘무법(無法)의 법(法)’이 바다 건너 해동에 있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조륜청정탑(보물 273호).

‘옥룡사선각국사혜등탑비(玉龍寺禪覺國師慧燈塔碑)’에도 혜철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혜철이 서당 지장에게 법을 받고, 동리산에서 법을 펴고 있는데 제자가 찾아오니, 스승(혜철)이 제자에게 무설의 설, 무법의 법을 텅 빈 가운데서 주고받아 환하게 깨우쳤다.” 

이와같이 혜철의 ‘무설설 무법법’ 선사상은 본래성불에 입각한 돈오사상이다. 굳이 설한 것도 없고, 들은 자 또한 들은 바가 없다는 뜻이다. 황벽희운(黃檗希運, ?˜856년)도 <완릉록>에서 “법을 설했다고 하지만 설한 바도 없고, (상대적으로) 법을 들었다고 하지만 들은 자도 없으며, 증득한 자도 없다”고 했다. 이 내용은 어록에 간간이 등장하며 선찰 도량에 ‘무설전(無說殿)’이라는 편액이 있기도 하다.

둘째는 선교(禪敎) 융합을 꾀하는 통합사상이다. 혜철은 스승 서당에게서 심인(心印)을 얻고도 3년 정도 대장경을 열람했는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선(禪)만을 주장하거나 고집하는 순선(純禪)이라기보다는 선과 교의 융합을 꾀하는 통합사상이라는 점이다. 신라 선문(禪門)은 오로지 선만을 내세우는 산문도 있지만 선교 융합을 주장한 산문도 있다. 앞에서 거론했던 가지산문 도의는 교를 배제하고 오로지 선만을 주장했던 반면, 혜철선사는 선교의 일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 

혜철의 제자 도선(道詵, 827˜898년)은 전남 광양시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머물렀기 때문에 옥룡자(玉龍子)라고도 한다. 도선은 도승(道乘)으로도 불리며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했고, 23세 때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846년 동리산문의 혜철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도선은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렀다. 도선은 이곳에서 35년간을 상주했으며, 수많은 제자들이 찾아왔다. 신라 헌강왕(875˜885년 재위)이 도선의 높은 인품을 존경해 왕궁에 초빙했는데, 둘은 초면인데도 오랜 벗처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도선은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했는데, 이는 지세를 살펴서 부족하고 어긋나는 곳(欠背處)에다 절과 탑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선이 72세에 입적하자, 효공왕(898˜912년 재위)이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시호를 요공(了空), 탑호를 증성혜등(證聖慧燈)으로 하사했다. 고려를 개국하는데 도움을 준 인연으로 훗날 고려 숙종(1096˜1105년 재위)이 대선사·왕사로 추증했으며, 인종(1123˜1146년 재위)이 선각(先覺)국사로 봉(奉)하였다. 

서당지장 법맥 받은 세 선사

가지산문 도의선사, 실상산문 홍척선사, 동리산문 혜철선사 모두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받은 제자들이다. 서당은 우리나라와 밀접한 선사이다. 서당은 마조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느 날 서당·백장·남전 세 사람이 마조를 모시고 달맞이를 갔다. 그 때 마조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 무엇을 하면 가장 좋겠는가?” 서당지장은 “공양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라고 했고, 백장회해는 “수행하기에 가장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남전만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버리자, 마조가 말했다. “경(經)은 장(藏, 서당)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해(海, 백장)에게로 돌아가는데, 오직 남전만이 사물 밖에 벗어났구나.” (<경덕전등록> 6권 ‘百丈章’)

조륜청정 탑비.

위 내용을 볼 때, 후대 기록에서 청규(淸規)를 제정한 백장 문하의 법맥이 강조된 면이 있고, 무자화두의 유명한 조주(778˜897년, 남전의 제자)로 인해 남전 문하가 부각된 점이 있다. 그러면서 그 반동으로 서당의 활약과 법력이 축소된 감이 있다. 하지만 당시 서당은 마조의 문하 가운데 장손급에 해당하며, 마조 문하를 대표하는 제자였다. 중국 문화에서 서쪽을 상징하는 이미지(西堂)로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마조 문하의 수제자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은이 쓴 ‘사증당비’에 의하면, 사천성(四川省) 삼대현(三台縣) 혜의정사에서 ‘무상과 무주, 마조와 서당, 네 분의 진영에 공양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 왕자 출신 무상대사와 무주(無住), 마조와 서당의 법맥을 연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마조계 문하의 선사상이 천하에 알려졌는데, 마조계 선(禪)의 대표로 ‘북방은 유관이요, 남방은 서당’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당시 서당의 선이 당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론된다. 

서당은 일찍 출가해 13세 때 임천의 서리산에서 마조를 시봉했고, 7년 뒤 마침내 법을 받았다. 745년 마조가 강서성 건주(州) 공공산(公山) 보화사(寶華寺)로 옮겨갈 때, 스승을 따라 서당과 몇몇 제자들이 함께 갔다. 다시 마조가 보화사에서 남창 개원사(開元寺, 현 우민사)로 옮겨 간 이후부터 서당은 마조가 법을 폈던 보화사를 지키면서 법을 전개했다. 이때 서당의 가르침을 따라 대중이 운집하는 것이 마치 마조가 살았을 때와 같았다고 전한다. 조계종에서 강서성 홍주(현 남창) 개원사(현 우민사) 도량에 2008년 ‘도의조사 입당구법기념비’를 모셨는데, 실은 이곳이 아니라 보화사에 모셔야 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서당은 보화사를 떠나지 않고 줄곧 이 곳에 머물며 법을 펴다 817년 원적했다. 당나라 헌종이 ‘대선교(大宣敎)’라고 하사했으며, 8년 후 목종이 다시 호를 ‘대각(大覺)’, 탑이름을 ‘대보광(大寶光)’이라 하사했다.

[불교신문3384호/2018년4월14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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