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는 돈 벌고 스님은 도 벌고…옥신각신 할 것 있나

계정혜 삼학, 수행자 필수과제 
기본 다지고 나면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들어 
중생 이롭게 하는 수행이 ‘진수’ 

“만족을 알고 살면 땅에 누어도 마음이 편하고 만족을 모르면 천궁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는 것입니다.” 지족암(知足庵)이라고 불리는 해인사 도솔암주(兜率庵主) 일타(日陀)스님이 금년 봄에 세운 초정(草亭)에서 기자를 맞는 인사말로 도솔천 내원궁 얘기를 들려준다.

네 모퉁이에 다듬지 않은 모습대로 자연목을 기둥삼아 세우고 무릎높이 만큼에 마루를 놓고 지붕은 산죽을 덮어 지은 초정(草亭)의 이름을 무어라고 지을까 하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일타스님. “유여정(有餘亭)이라고 지으면 어떨까. 바쁜 중에 여유가 있는 것이 좋겠어. 중이 바쁠 것도 없지만 말야. 혹 알 수 없지. 바쁜 중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파안대소하며 의미 섞인 말로 말머리를 잡는다.

“미륵불은 한국에서 날것이 틀림없어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 봤지만 부처님의 사상이나, 불교의 전통이 고수되어 내려오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지요. 역사 속에 나타난 불교국가들 중 제일 으뜸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발상되었지만 그 자취만 남아 있을 뿐이고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등 불교국가는 공산화 되어 서서히 불교의 전포지는 좁혀져 버렸고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했던 중국의 대륙도 맥락이 끊겨 활동이 중지된 상황임이 주지의 사실임을 밝히는 일타스님.

“대만불교나 홍콩불교는 피난 나온 불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은 중국의 대륙에 들어가 혜맥을 잇는 것이 꿈입니다. 또 일본은 대부분 대처승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불교 갈 곳이 어디겠습니까?” 일본의 경우는 외래문물을 받아들여 옛 모습은 찾을 길 없이 변모했고 옛 전통 속에 고찰이 좀 남아있는 곳은 나라(奈良)에 일부뿐이라는 설명을 던진다.

“그래도 한국의 사원이나 사찰의 모습은 복고(復古)되어 역사를 지키고 있고 전통의 가사장삼을 수하고 예불하는 모습이나 젊은 스님들의 탐구적 자세는 세계 어디에도 자랑할 수 있는 가풍이며 살아있는 불교라고 자처할 수 있습니다.” 외국을 두루 돌아본 결과를 함축성 있게 설명해 주는 일타스님은 옛 조사의 가풍이 이어지는 유일한 곳이 한국 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근간에 공부를 하려는 의욕 있는 젊은 스님들이 많음은 이 나라 불교의 앞날을 점칠 수 있다고 기대를 걸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하고 “신도들은 돈 벌고 스님들은 도(道) 벌고, 신도는 스님들 밥 먹여 주고 스님은 신도들에게 법문해주고 어때?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데 뭐 옥신각신 할 것 있는가”라고 한다. 또 스님들이 싸우는 것처럼 사회에 알려지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는 일타스님.

“싸우는 스님도 극소수의 일부이고, 나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참선자, 기도자, 경학 하는 스님들은 자기 일 자기하면 다 잘될 겁니다.” 일부분이 탁해진 것을 전부로 알면 어려움만 따를 뿐 도움 될 일이 못된다고 경고하고 행정 하는 스님들은 불교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종책을 펴 공부하는 사람들이 여념 없이 공부에 임할 수 있도록 당부한다. 율(律)에 대한 물음이 시작되자 일타스님은 손을 좌우로 흔들며 “율사(律師)? 우리나라 불교정화는 율의 복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율을 보는 사람이 없고 그 가운데 내가 율을 좀 보았다고 해서 그런 모양인데 율 안다고 할 수 없어요.”

계와 율의 차이점을 간략하게 설명한 스님은 “어렵고 엄격한 것으로 미리 짐작하여 기피하는데 알고 보면 전부 부처님 말씀이고 자애롭고 순순위곡 자상스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스님의 얘기보다 부처님 당시의 얘기를 들으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준다.

“‘고기를 먹지 말라’에 대해 제자가 부처님께 고기를 먹으면 어떠합니까?”하고 물었다. “대자비 불성종자를 끊는다. 고기를 먹으면 내 제자가 아니리라” “부처님. 얻어먹는 사람이 보리밥 쌀밥을 가릴 수 있습니까. 고기를 얻었을 때는 버리나이까?” “고기만 건저내고 먹어라” “부처님 고기를 건져낼 수 없을 정도일 때는 어찌합니까?” “물을 조금 부어넣었다가 넣은 물만큼 부어내고 먹어라”

이와 같은 얘기를 들려주신 일타스님은 끝끝내 먹고 싶어서 먹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부언해 준다. “법을 알고 보면 겁날 것이 없어요. 법을 알고 지키면 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당연히 지켜야 할 조령에 불과한 것을 회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지요. 사회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 끝에 옛이야기 한수를 비유해서 일러준다. 절을 찾아 신세를 좀 졌던 어떤 처사가 장날 시장에서 스님을 뵙게 되었다. 반갑기도 하고 그간 스님에게 진 신세도 갚을 겸 스님을 집으로 모시고 갔다. 그러나 막상 스님에게 대접할 만한 물건이 없고 가난했기 때문에 씨앗으로 남겨뒀던 밀을 맷돌에 갈아서 칼국수를 지었다. 가난한 집이라 마땅히 넣을 것도 없고 해서 멸치 부스러기와 새우젓 국물을 좀치고 해서 대접을 했는데 스님은 딱 한 수저 떠서 먹더니 수저를 놓고 말았다. 스님의 비위에 맞지를 않는 것이다. 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절로 올라 가셨다. 이에 대해 처사는 “천상 중노릇 밖에는 못할 사람이군. 그러나 중이기 전에 인간인데 사람의 성의를 이렇게 무시할 수가…” 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 끝에 가섭존자가 문둥이로부터 공양물을 받아먹은 얘기를 한다. 바루에 문둥이의 손가락이 떨어져 있었지만 가섭존자는 문둥이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을 젖히고 음식을 다 먹었다고 한다. “이런 정신이 승려의 정신이고 보살행이지요. 음식이 맛있다고 먹고 맛없다고 버려서는 안 되지요. 계행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생을 떠난 부처가 있을 수 없고 중생을 떠난 스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생과 더불어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수행이 곧 불교의 진수라고 말하는 일타스님은 시정(市井)을 떠나 산사(山寺)에 머무는 데는 스님의 숭고한 뜻도 있지만 도반과 젊은 스님들의 권유라고 한다. ‘스님 같은 이가 사회 속에 왔다갔다하면 믿을 데가 없다’는 것과 ‘그래도 스님 같은 이가 산속에 있는구나 생각해야 마음 든든하다’는 여러 사람의 뜻이 그지없이 마음에 들었고 산속에 은거하다보니 공부가 저절로 된다고. 어느 땐가 산중회의가 큰절(해인사)에서 있었는데 회의의 움직임이 큰절 주지를 시킬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공부 좀 하려고 산속에 들어온 사람보고 주지하라고 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더군요. 그래서 밤새 아무도 몰래 도망을 갔습니다.” 부처님 경문 읽고 행하는 것은 잘할지 모르지만 그 외 것은 자신이 없다는 일타스님의 소탈한 생각은 지금의 암주(庵主)도 힘에 벅찬 것이라고 한다. “수행하는 사람이 수행이 전부로 알고 수행을 생명처럼 아껴야 합니다. 또 과거에 포교하러 많이 다녔습니다.

이곳에 머물며 공부하는 것도 포교지요.” “변소간 가다가 가방 주은 듯이 감투 쓰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는가”라며 웃는 일타스님의 진의를 알 것 같다. 주지를 하라면 달아날 주(走)자에 갈지(之)자 주지(走之)가 마음에 든다고. 계(戒)·정(定)·혜(慧) 삼학은 수행인의 필수 과제로써 이를 무시한 수행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단호히 못 박는다.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단단히 다져야 하듯, 계는 1층을 세울 기초에 해당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초를 다지지도 않고 1층 없이 2층이나 3층을 세울 수 없는 것과 같이 명확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시대 중생과 더불어 살아가는 스님들이 계행에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기본을 다지고 나면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든다고 일타스님은 율사행을 반조해 말한다. 중생을 저버린 계율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일타스님. 초정에 앉아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부처님 은혜로 세계 곳곳도 구경했고 이제 갈 곳도 없어 이곳에 앉아 정진해야지” 그래서 휴휴경휴휴(休休更休休) 만해상파정(萬海上波靜) 적적단경문(寂寂斷見聞) 묵묵대남산(黙黙對南山)이라고 읊는다. 짙은 녹음 속에 우뚝 솟은 지족암이 만족함을 이제 느낄 것 같다. 

1982년 6월20일자 불교신문 6면에 실린 양범수 기자의 일타스님 인터뷰 기사 사본.

■ 일타스님은…

1929년 9월2일(음력 8월1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42년 공주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1943년 윤고경스님을 은사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45년 통도사 보광중학교를 졸업, 1946년 송광사 삼일암 효봉스님 회상에서 첫 하안거를 보내고 그해 동안거는 속리산 복천암에서 지냈다. 1949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아 지녔다. 이후 일대사를 해결할 것을 발원하던 중 스님은 1954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장좌불와와 매일 3000배씩 일주일간 기도정진에 들어간 후 오른손 네 손가락 열 두 마디를 연비한다.

태백산 6년 정진을 통해 정법과 대원과 대행을 구족한 스님은 1960년 산에서 내려와 걸림 없는 교화의 길을 열어보였다. 1992년부터 불자들의 올바른 신행활동을 위해 집필을 시작, 알기 쉽고 깨달음이 깊은 저서를 다수 남겼다. 또한 65세 되던 1993년 조계종 전계대화상, 1994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되고 은해사의 조실로 주석하며 후학들을 지도했다. 1999년 11월29일(음력 10월22일) 미국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입적했다. 세수 71세, 법랍 58세. 같은 해 12월5일 은해사에서 영결식과 다비식을 봉행했다.

[불교신문3384호/2018년4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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