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 만세 외쳐 시위에 참가하라”

신륵사 영봉스님 주도
무명천 태극기 흔들며
마을 주민 규합 '만세'
남한강변서 시위 벌여

1919년 4월3일 신륵사 스님과 주민이 여주읍으로 건너지 못한 채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던 남한강 백사장. 영월공원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 야트막한 산에 신륵사가 있다.

독립만세 운동의 열기가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1919년 4월 3일. 여주군(지금의 여주시) 신륵사 인근 백사장에 200여명의 주민과 스님이 모였다. 남한강을 건너 여주읍내로 들어가 만세운동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다리도 배도 없었다. 이 때 한 스님이 앞에 나서 무명천으로 만든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선창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백사장에 모인 200여명의 군중도 목 놓아 독립만세를 외쳤다. <편집자>

시위 대열을 이끈 이는 여주 신륵사에 주석하고 있는 영봉스님이었다. 속명은 김용식(金用植)으로 또 다른 이름은 인찬(仁瓚)이었다. 당시 신륵사 주지였다. 법명은 영봉으로 전해지는데 어떤 한자를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스님은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에 거주하는 권중만(權重晩), 권중순(權重純), 조규선(曺圭善) 그리고 당우리에 살고 있는 조석영(曺錫永), 조근수(趙根洙) 등과 의기투합하여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뜻을 모으고 4월3일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천송리는 신륵사 인근 마을이고, 당우리도 신륵사에서 멀지 않았다.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가 고향인 김용식 스님은 평소 인연이 깊은 마을 주민과 신륵사 신도들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펼친 것이다.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조석영은 북내면 면장으로 지역유지였다. 스님이 지역 주민과 유대가 깊었고 신망을 받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4·3만세시위를 주동한 영봉스님. 속명은 김용식이다.

이날 여주군 북내면 소재지인 당우리를 출발한 시위 대열은 신륵사 인근인 천송리를 거쳐 여주읍내로 향했다. 처음에는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남한강 백사장에 도착했을 때는 수백여 명이 함께했다. 법원 판결문에는 200명이 동참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시위 규모를 축소하고자 했을 일제 입장을 고려하면 참여 인원은 200명을 훌쩍 상회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한강변 백사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주민과 스님들은 더 이상 읍내로 향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조선독립만세’를 수차례 부른 후 마을과 사찰로 돌아갔다. 일경(日警)은 주동자 검거에 들어갔다. 김용식 스님을 비롯해 권중만, 조규선, 조석영, 조근수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특히 주모자로 분류된 스님은 1919년 7월26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 받았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지만 여주군은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3월26일과 27일 주내면 상동리에 거주하는 조병하와 심승훈이 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준비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여주지역에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 신륵사 스님이 주동이 된 4·3만세운동이었다.

같은 날 대신면 윤촌리에서는 황재옥이 주민 50여 명과 함께한 만세시위가 있었고, 여주읍내에서는 4월 2일 1000여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했다. 역시 4월2일 북내면 장암리에서는 경성농업학교 학생 원필희가 앞장서 주민과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또한 4월 1일에는 이포(梨浦)에서 군중 2000여 명이 모여 일본헌병대와 충돌하는 등 여주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거세게 일어났다.

신륵사 스님과 마을 주민이 함께한 4·3만세시위의 맨 앞에는 김용식 스님이 서 있었다. 당시 35세 였던 스님의 고향은 여주였다. 재판기록 등에 따르면 본적과 주소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6이다. 또한 거주지는 신륵사, 직업(신분)은 승려로 기재되어 있다.

4·3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스님의 판결문에는 당시 상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자 크게 그 취지에 찬동, 스스로 정치 변혁의 목적으로 독립시위운동을 하려고 꾀하여”고 시위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피고는 김용식 스님이다.
 

1919년 4·3만세운동으로 재판받은 영봉스님 판결문. 오른쪽 네 번째 줄부터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 거주, 승려 김인찬 사(事), 피고인 김용식’이라 적혀 있다.

또한 재판부는 “(피고가) 권중순, 조규선, 조석영, 조근수 등에게 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시위운동에 참가하라”고 권유(했다)”면서 “이민(里民) 수십 명을 위의 천송리에 규합하여 같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이 동리를 출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남한강 백사장 상황도 생생하게 담았다. “합계 200여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동 읍내의 한강(漢江) 대안에 이르러 태극기를 떠받들고서 군중을 정렬시켜 피고가 스스로 선창하여 두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군중이 따라 부르게 함으로써 안녕 질서를 방해한 자이다.”

일제는 2년형을 선고했다. 스님에게 적용된 법률만 해도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 형법 제6조·제8조·제10조 등 다수에 이르렀다. 평화적으로 독립을 주장했음에도 과중한 형벌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4·3만세시위에서 스님이 높이 치켜들었던 ‘무명천으로 만든 태극기’는 압수당했다. 이같은 사실도 재판 기록에 게재되어 있다.

이후 1919년 4·3만세시위 이후 스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995년 <불교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형무소에서 불에 달군 인두로 고문 받아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갔지만, 밀고로 도망을 다니다 신륵사로 되돌아 왔다. 스님에게 공부한 박치민 옹은 1995년 <불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평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면서 “동리 사람들이 ‘대나무 스님’이라고 별명을 붙였을 정도로 성품이 강직했다”고 회고하기도 해다. 또한 불화, 서예, 한의학, 웅변에 능통해 명성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박 옹은 스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기억했다. “항상 불법(佛法)에 어긋나는 삶은 살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나무와 꽃을 좋아해 마을과 사찰주변 녹화사업 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신륵사에 왔을 때 스님은 이틀밤을 같이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독립지사였기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이어졌다. 신륵사 주지도 강제로 내놓았다. 김용식 스님은 1981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났으며, 1983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1994년 9월7일 국립현충원(대전)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3·1운동이 일어난지 100주년이란 세월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억불숭유의 어둠에도 굴하지 않고 등불을 이어온 스님들. 망국의 아픔에 좌절하지 않고 민초들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외친 구국의 충정은 지금은 물론 후대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여주 신륵사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 5>,<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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