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년만에 엎드린 채 나툰 마애부처님

 

경주 열암곡 마애불. 토사를 막기위한 모래주머니, 진동을 감지하기 위한 진동계 등 안전을 위한 장비가 설치되어 있다. 경주시청의 도움으로 간이 보호천막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을 뵐수 있었다.

지난 15일 경주를 찾았다. 일기예보에는 종일 비가 예상되어 있었다. 경주역에서 도착한 순간부터 비가 계속 내리기 시작했다. 비도 피하고 찾아보고 싶은 유물이 있어 먼저 국립경주박물관을 향했다. 1945년에 개관한 경주박물관은 우리나라 박물관의 맏형 같은 곳이다. 

상설전시관으로 향했다. 그 곳에 많은 유물들이 있지만 오늘 보고자 하는 성보는 백률사에 전해오던 이차돈 순교비다. 

한국불교사의 유일한 순교자 이차돈 

1700년 한국불교사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순교자 이차돈(506~527)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이다. <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편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滅身)’조에는 염촉 즉 이차돈의 희생으로 신라의 불교공인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본기>에 법흥왕(재위 514~540) 14년 이차돈이 불교를 위해 몸을 바쳤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원화(元和) 연간(806~820) 남간사 일념스님이 ‘촉향분예불결사문’에 남겼고,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이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법흥왕은 사찰을 짓고 부처님 법을 널리 펴길 원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해 한탄했다. 그 때 조정의 낮은 벼슬인 사인(舍人)의 이차돈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신하의 절개라며, 자신을 참수하면 백성들 누구 하나 왕의 명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며 방안을 제시했다. 죄 없는 이를 죽일 수 없다는 법흥왕에게 이차돈은 “목숨이야 말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나 자신은 저녁에 죽더라도 아침에 불법이 행해지면 부처님의 해가 뜨고 왕의 길이 편안해질 것”이라고 고했다. 이차돈의 뜻을 받아들인 왕은 군신을 불러 모은 뒤 ‘사찰불사를 고의로 지체시킨다’는 이유로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목에서 흰 젖이 솟아올랐고, 땅은 진동하고 캄캄한 하늘에선 꽃비가 내렸다. 이차돈의 보살행을 찬탄하며 눈물짓던 왕은 시신을 수습해 금강산에 장사를 지내고, 좋은 곳에 사찰을 짓고 이름을 자추사(子推寺)라고 이름을 붙였다. 백률사를 자추사의 후신으로 보는 것은 순교비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이차돈 순교비.

사진으로 보던 순교비보다는 직접 보니 보다 크게 느껴졌다. 순교장면이 뚜렷하게 조각된 비는 헌덕왕 9년(817)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육각형으로 한 면에는 책의 기록처럼 이차돈의 목에서 흰 젖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했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줄을 긋고 칸마다 글자를 새겼다. 한국불교의 유일한 순교자를 기리는 비를 박물관에서 볼 수밖에 없다니 불자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오는 8월5일 까지 특별한 신장들이 전시된다. 사천왕사를 외호하던 신장들로 작은 파편으로만 남아 있던 신장들이 100년 만에 원형모습으로 복원됐다. 

100년 만에 제짝 찾은 사천왕사지 신장

사천왕사는 679년에 문무왕이 경주 낭산에 창건한 호국사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의 청을 받아 명랑스님이 밀교의식인 ‘문두루 비법’을 행해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초기까지 번성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폐사된 절터에서 녹유전 일부가 발견된 것은 일제강점기다. 1915년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서탑터에서 녹유전 조각을 발견했으나, 당시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어 다시 땅에 묻었다. 이후 1918년과 1922년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발견된 유물조각으로 연구가 이어졌다. 

사천왕사지에서 발굴돼 100년 만에 완벽히 복원된 녹유신장상.

특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200여 점의 파편을 수습했다. 3D스캔을 통해 세 종류의 신장을 복원했다. 큰 눈과 콧수염, 날개가 달린 투구와 화려한 갑옷, 신발 또는 맨발로 칼 혹은 화살을 든 무장 3명이 험악한 표정의 생령(生靈)을 깔고 앉아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화려한 조각술에 놀라며 박물관 나서니 어느새 비가 약해지고 있다. 서둘러 남산으로 향한다. 

2007년 발견된 원형 그대로의 마애불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의 남쪽에는 신라인들의 영산(靈山)이라 불리는 남산이 있다. 남산에는 140여 곳의 불교유적, 100여구가 넘는 불상과 수십 기의 석탑이 남아 그 모습 그대로가 불국토이다.<삼국유사>에 따르면 옛 서라벌 모습을 ‘절들은 별처럼 많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을 지었다(寺寺星張 塔塔雁行)’했는데 이런 모습은 지금 경주 남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늘 찾아가는 곳은 남산 열암곡이다. 열암곡은 남산 남단의 고위봉(494m)과 봉화대봉(476m), 천왕지봉(433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들에 의해 형성된 골짜기 중 하나로 가장 긴 골짜기가 백운계곡이며 백운계곡 오른 편으로 세 개의 골짜기가 이어지는 데 열암곡은 그 중 제일 아래 위치한다. 경주 내남면 백운대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새갓골 주차장 다다른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산길로 800m 오르면 열암곡 석불좌상과 천년 넘게 잠들어 있던 마애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다행히 세차게 내리는 비가 멈췄다. 천천히 걸어 오르니 30분 후 먼저 열암곡석불좌상을 만나게 된다. 멀리서 인사를 올리고 우선 그 옆에 검정색 차양막이 씌워진 간이막사를 향한다. 그 안에 엎드려 계신 마애불상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인사를 올린다. 상호의 옆모습만 감상할 수 있어서인지 부처님의 오뚝한 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코는 아래 바위와는 겨우 5cm 정도 차이가 나고 있다. 천년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70톤이 넘는 바위 덩어리가 아래 바위와 충돌했다면 지금 같이 완벽한 모습의 부처님을 볼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애불이 조각돼 있는 거대한 바위의 무게는 70톤이 넘는다.

열암곡마애불은 남산이 남아 있는 100여구의 불상 중 가장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 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가 통째로 떨어져 나와 엎드린 채로 있었고 이후 흙으로 덮여 풍화가 되지 않은 탓이다. 열암곡 마애불은 2007년부터 얼굴을 드러내기 위한 논의가 진행됐으나 거대한 크기와 무게 등으로 난항을 겪었다. 입불(入佛)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90도로 돌려 와불(臥佛) 형태로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됐으나 이뤄지지 못했고 연구용역을 맡은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지반을 보강한 뒤 호이스트 크레인이라는 장비를 이용하면 마애불을 세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호이스트 크레인으로 입불을 하기 전 안전성을 파악하기 위한 모형실험에만 24억원이 소요된다고 해서 우선은 주변 정비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부처님을 보다 안정하게 모시기 위한 정비작업이 이뤄지고 많은 좀 더 편안하게 부처님을 뵐 수 있도록 조치되면 좋을 듯하다. 삼국유사에 보면 부처님과 문수보살이 이 곳 남산과 바위에 머물면서 권세있는 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내려와 꾸짖고 가르침을 주고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 내려와 보살펴 준다고 신라인들은 믿고 있었다. 

11년이 지나도 아직 마애부처님을 바로 세우지 못한 관계기관을 탓할 필요는 없다. 1100년 만에 엎드린 채로 나투신 부처님을 맞이하는 환희심을 느끼기에는 아직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불교신문3379호/2018년3월28일자] 

경주=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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