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다. 내 고향은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호미를 들고 뒷산에 올라 냉이를 캤다. 언 땅에서 올라오는 냉이는 초록이 아니라 자줏빛이 돌았다. 호미로 땅을 파니 냉이의 하얀 뿌리가 드러났다. 굵은 뿌리를 가진 놈은 쉽게 뽑히지 않아 뿌리절반이 뭉텅 잘리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어느 순간 먼데 백구가 묻힌 자리가 보였다.‘백구야, 나 왔어. 잘 있지?’ 

십여 년 전, 부모님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했다. 흙을 만지는 기쁨도 잠시 곤란한 일은 생각지 못한데서 생겼다. 그 집의 전 주인이 키우던 개가 주인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었다. 한 번도 사람 손에 잡히지 않는 개라 왜 안 데리고 가느냐고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개는 그렇게 반은 억지로 우리와 한 식구가 되었다. 개는 하얀 색 작은 여우같아 백구로 불렸다. 가장 흔한 개 이름이었다. 백구는 종일 산과 언덕을 돌아다니다 아침저녁으로 잠만 자러 들어왔다. 어느 날은 쥐나 두더지를 잡아다 현관 앞에 척 놓아둔 탓에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백구의 나이는 십오 년을 넘어갔다. 사람으로 치면 구십이 넘는 나이라고 했다. 천천히 이빨도 빠지고 털도 빠졌다. 동네 할머니들은 백구에게 “언니야, 왔나?” 하면서 먹이를 건네주곤 했다. 백구는 동네 모두의 개였다.

추수가 한창이던 지난 가을 백구가 죽었다. 아버지가 다가가 안으니 백구는 죽기 직전 그제야 가만히 안겼다고 한다.“백구야, 걱정마라. 내가 너 좋은데 묻어주마.”아버지는 슬픔을 누르며 약속했다. 백구는 집 뒤 양지바른 계곡에 묻혔다. 거기서는 백구가 일생을 뛰어다녔던 온 동네와 집과 언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나는 냉이를 캐다말고 백구가 묻힌 곳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도 마른 낙엽, 솔방울, 썩은 밤과 도토리 사이로 냉이가 올라와 있었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그 냉이를 보며 무수히 죽어간 어떤 생명들에 대해 생각했다. 수많은 낙엽과 열매와 벌레가 죽어서 흙이 되고, 수많은 백구와 백구의 주인들이 땅에 묻혀 흙이 되고, 그래서 지금은 그 흙속에서 냉이가 돋아났구나. 끓는 물에 냉이를 넣으니 자줏빛 이파리들은 금세 초록으로 변했다. 물기를 꼭 짜 고추장에 무쳤다. 냉이를 입에 넣고 씹으니 입 안 가득 퍼지는 봄의 기운들. 그래, 다시 봄이다. 생(生)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었음을, 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들이 어제의 그들이며 다음은 또 내 차례겠구나 싶어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냉이를 씹어 삼켰다.

[불교신문3375호/2018년3월14일자] 

전은숙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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