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도 이 기회에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

봉선사 서기실에서 모의 
사하촌 등에 ‘격문’ 배포
지역 항일 운동 ‘기폭제’
지월,운암 스님 등 ‘옥고’

일제강점기의 봉선사. 한국전쟁 당시 절 대부분이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도 이 기회에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달이 다가 오던 1919년 3월29일 양주(지금은 남양주) 봉선사 인근 마을에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격문(檄文)이 배포됐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한 일경(日警)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집집마다 뿌려진 이 전단의 작성 주체는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朝鮮獨立團臨時事務所)’였다. <편집자>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는 봉선사 스님들이 독립만세운동 확산을 위해 작명(作名)한 것이다. 주도적으로 참여한 스님은 이순재(李淳在, 지월스님), 김성숙(金星淑, 운암스님), 강완수(姜完洙), 현일성(玄一成), 김석로(金錫魯) 등 이었다. 이 가운데 김성숙은 훗날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운암스님으로 또 다른 이름이 김성암(金星岩)이다.
 

김성숙(김성암) 스님의 옥중 수형카드에 실린 사진. 1919년 투옥 당시 모습.

봉선사 서기실(書記室)에서 비밀리에 회합하여 의견을 나누고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담은 전단을 만든 스님들은 사찰 인근 주민들에게 이 같은 뜻을 알렸다. 당시 전단에 파리강화회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국제정세에도 밝았음을 증명한다. 

1919년 1월 18일 시작해 1920년 1월 21일까지 프랑스 수도에서 수차례 열린 파리강화회의는 민족 자결주의를 천명하며 국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양주에서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13일과 14일 미금면 평내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등 지역에서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봉선사 스님들이 마을에 배포한 전단은 일경에 알려져 지월스님과 운암스님 등 여러 명이 투옥됐다. 운암스님은 1919년 9월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지월스님은 같은해 5월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6월형을 선고 받은 후 경성복심법원 등 상급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되었다. 강완수 스님도 징역 8월형을 선고 받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한 봉선사 스님들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강완수(강완주) 스님의 옥중 수형카드에 게재된 사진. 1919년 투옥 당시 모습.

남양주 봉선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서 오른편에 자리한 부도전에는 지월스님의 비가 서 있다. 한문으로 ‘池月堂淳載和尙建國有功行蹟碑(지월당순재화상건국유공행적비)’라 쓰여 있다. 1997년 건립한 유공비에는 3.1운동 당시 지월스님을 비롯한 봉선사 스님들의 독립운동 자취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지월스님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까닭은 유공비에 다음과 같이 담겨 있다. 

“화상의 성정이 온화하시고 공정하심이 알려져서 주로 사유(寺有) 토지의 질서 관리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아 보시게 되었으나 항상 말씀이 없으시고 사색이 깊으셨다. 더구나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화상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때 마침 서울에 유학중이던 태허당(太虛堂) 성암(星岩) 화상의 귀향으로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화상은 분연히 일어나 만세운동을 일으키시니 이것이 지역 항일운동의 기폭제이기도 하였다.”

지월스님을 비롯한 봉선사 스님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양주 등 경기 북부지역의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19년 3월 29일 지월스님이 머무는 거처에 마을 주민들이 모였다. 전단을 배포하기 전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광릉천 강가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자”는 내용의 통문(通文)이 전해졌다고 한다. 

유공자 비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때의 일을 더벅머리로 따라 다니면서 목격했던 이 지역의 원로 강학돌, 주서환, 박순이 등 제씨(諸氏)의 말에 의하면 그때 광릉천에는 연일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고 그때 마다 헌병이 나와 총을 쏘며 줄줄이 잡아갔다고 한다.”
 

1919년 3월31일 광릉천에 집결한 양주 군민과 스님 등 6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광릉천의 현재 모습.

부평리 주민 등 양주군민과 스님 등 600여 명은 1919년 3월31일 광릉천에 집결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독립기념관의 ‘국내 독립운동, 국가 수호사적지’에 따르면 광릉천 만세운동이 벌어진 장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11번지(당시 주소는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이다. 지금은 진접중학교와 강변아파트 사이에 있는 하천 부지이다.

독립기념관의 ‘광릉천 3·1운동 만세시위지’라는 자료에는 이에 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 부평리에 사는 이재일(李載日)은 ‘거주하는 동리의 주민 일동이 광릉천(光陵川) 강가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전달받았다. 이재일은 즉시 동리 사람들과 격문을 돌려 읽고 대책을 논의한 끝에 3월 31일 광릉천 강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3월 31일 이재일, 김순만(金順萬) 등을 비롯한 주민 600여 명은 광릉천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제는 헌병들을 출동시켜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며 시위를 주도한 이재일 등 8명을 체포해 기소하였다. 이 일로 이재일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봉선사 경내에 있는 지월당재순화상건국유공행적비

이날 광릉천 만세시위에 참여한 대중은 강제 해산됐지만 양주 지역의 독립운동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1919년 4월2일에는 김성숙, 이순철, 현일성, 강완수 등 4명의 스님이 주동해 양주군 광주시장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지월스님은 1891년 6월3일 서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2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봉선사 사하촌으로 이사했으며, 1905년 봉선사에 입산해 1910년 해운당(海雲堂) 양극(亮極) 스님에게 득도했다. 봉선사 도사(都寺)와 협의원(協議員), 봉영사 주지 등의 소임을 역임했다. 도사는 ‘도감사(都監寺)’의 줄인 말로 ‘도감’이다.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등을 맡아보는 직책이다.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고문 때문에 오른쪽 볼에 구멍이 생겨 공양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또한 시위에 동참했던 주민이나 가족들의 “당신 때문에 날벼락을 맞았다”는 원망을 묵묵히 감수해야만 했다. 스님은 1944년 7월25일 봉선사에서 세수 54세, 법랍 33세로 입적했다. 1986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지금의 봉선사 경내. 설법전에서 대웅전을 향해 촬영한 것이다.

봉선사 대중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지월스님은 일제 당국에게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현실에 좀처럼 타협하지 않고,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강경파였던 것이다.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는 등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이란 제목의 책에는 지월스님의 활약상이 전하고 있다. “지월스님은 독립만세에 참여한 수백 명의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들고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했다. 투쟁 과정에서 일본헌병분소에 들고 있던 태극기를 꽂고 나오는 대담성을 보인 지월스님은 독립운동의 주동자로 일경에 체포됐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월, 운암 스님 등 봉선사 스님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숭고한 뜻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봉선사에서 열린 고종 황제 제사 기사를 게재한 매일신보.

 

참고자료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국내 독립운동·국가 수호사적지’, 일제강점기 옥중 수형카드, <매일신보>, 지월당순재화상건국유공행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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