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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4> 정중무상(淨衆無相) 上 - 입당 구법시기한 번 선정에 들면 5일…초기선종사 대선지식
  •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 승인 2018.03.0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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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 출신
누나 불심에 감화 군남사 출가 
禪 유포 전 당나라로 간 선사

唐 현종이 주선 선종사 머물다
소지공양ㆍ천곡산 두타행 끝에
처적 선사 가사와 법 이어받아 

깊은산 먹이 찾던 짐승도 감화
송고승전 등에 “신이한 고승…”
무덤 가 사찰 지어 보시하기도  

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로 치열한 수행과 덕화로 당나라에서 널리 칭송받은 무상대사는 깊은 산속에서 음식이 없어지면 흙을 먹을 정도로 수행했다. 맹수들조차 감화를 받아 그를 호위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여러 서적에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그가 처적 선사로로부터 법을 받고 수행한 덕순사(현 寧國寺) 보리도량 당우 내부 그의 행적이 그려진 벽화.

대한불교조계종의 연원은 9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서도 가지산문이다. 이 가지산문을 포함한 아홉 산문, 그리고 여러 산문이 신라 말부터 고려 초인 821~932년에 개산(開山)됐다. 이렇게 선(禪)의 산문을 연 스님들은 당나라로 유학 가서 최소한 7년에서 30여 년간 수행한 뒤 스승에게 법을 받아왔다. 그런데 신라 땅 곳곳에서 선이 유포되기 이전, 당나라로 건너간 구법승 중에 선사가 된 분이 있다. 바로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대사이다. 무상대사는 현종(712˜756년 재위) 때 입당하여 중국 선종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곳에서 입적한 선사이다. 무상은 비록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한국선사상 입장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역대 왕족들의 출가 

<유마경> 13품 ‘법공양품’에는 보개왕의 아들 출가이야기가 나온다. 신심 깊은 보개왕에게 아들이 1000명인데, 이들은 모두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데 극진했다. 왕자 가운데 월개 왕자는 신심이 가장 뛰어나 약왕여래께 수기를 받고 출가해 비구가 된다. 또 <법화경> 27품 ‘묘장엄왕본사품’에는 두 왕자가 부모를 부처님께 귀의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운뢰음숙왕화지부처님 때 정장과 정안 왕자는 신심이 극진했다. 두 왕자가 출가하고자 할 때, 왕비는 왕자들에게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기 어려운데 출가하는 것이 기특하다’며 적극적으로 권유한다. 이후 두 왕자가 출가하였고, 부친인 묘장엄왕과 모친을 부처님께 인도하여 이들도 모두 출가토록 한다. 

경전에 왕족들의 출가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도 왕족이었고, 부처님 재세 시 육사외도 가운데 하나인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도 왕족 출신이다. 이런 영향인지 <해동고승전>에 신라에 불교 수입을 공인시킨 법흥왕(514˜539년 재위)도 출가해 법명을 ‘법운’이라고 했고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묘법’이라 불렸다. 또 ‘순치황제(順治皇帝) 출가 시(詩)’로 유명한 청나라 3대 황제인 순치제(1643˜1662년 재위)도 있다. 

우리나라도 왕자 출신 승려가 매우 많다. 심지(心地)는 신라 41대 헌안왕의 아들로서 15세에 대구 팔공산에서 출가했는데 훗날 동화사의 창건주이다. 원측도 신라 왕손이며, 무루는 신라 어느 왕의 왕자로 당나라에서 활동하다 그곳에서 입적했다. 고려 때는 삼국시대보다 왕손 출가자가 더 많다. 의천(1055˜1101년)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서 11세에 출가했고, 징엄(1090˜1141년)은 숙종의 넷째 왕자로서 의천을 스승으로 출가했다. 종린(1127˜1179년)은 인종의 아들로서 징엄을 스승으로 출가했고, 이어서 충희(?˜1182년)는 인종의 넷째 왕자로서 종린의 제자이다. 각응(?˜1250년)은 희종의 다섯 째 왕자이고, 현응(?˜1139년)은 숙종의 아들이며, 요일은 명종의 숙부이다. 증통은 태조 왕건의 다섯 째 왕자이다. 도생은 문종의 여섯 째 왕자이고, 각관도 왕실 출신이고, 지인(之印, 1102˜1158년)은 예종의 왕자이다. 

왕족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삶의 고뇌에서 해탈하고자 출가했다. 그런데 모든 왕족들의 출가가 부처님과 같지 않다. 우리나라 왕족들의 출가 경향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경전 내용처럼 순수함으로 출가한 경우이고, 둘째는 왕족으로 태어나 왕이 되지 못하는 비운을 극복코자 출가를 선택하는 경우이다. 셋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왕자 출신 승려가 필요해 그 요건에 부응해 출가한 경우이다. 고려 때 왕자 출신 승려들이 대부분 승통이나 왕사, 국사를 역임한 점을 볼 때,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무상대사는 어떤 마음으로 출가했을까? 필자의 추측이지만, 첫째인 신심적인 면도 있지만, 두 번째인 왕족으로서 태어난 운명에 대한 도피성도 없지 않다. <송고승전>에 신라 사신이 무상을 해하려고 했던 내용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순사(현 寧國寺) .

무상대사의 행적 

무상대사는 신라 성덕왕(702˜737년 재위)의 셋째 왕자이다. 성덕왕(?˜737년)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타계하자, 성덕왕은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재위 기간 중 당나라에 사신을 약 43회 정도 파견할 정도로 당나라의 신진문화를 받아들였던 뛰어난 개혁 군주였다. 

<역대법보기>에 대사의 출가에 대해 이런 내용이 전한다. “무상대사가 어릴 적, 바로 손위 누나가 출가하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왕가에서는 그녀를 억지로 시집보내려고 했다. 누나는 칼로 본인의 얼굴을 찔러 자해하면서까지 출가코자 하는 굳은 의지를 사람들에게 보였다. 무상은 출가하고자 하는 누나의 간절한 불심(佛心)을 지켜보면서 ‘여린 여자도 저런 마음을 갖고 출가하고자 하는데, 사내대장부인 내가 출가해 어찌 법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강한 의지를 품었다.” 이후 성인이 된 무상대사는 군남사(群南寺)로 출가하였고, 얼마 후 728년(성덕왕 27) 44세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무상이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하다가 현종(712˜756 재위)을 알현했다. 현종은 무상에게 섬서성 장안(현 西安)에 위치한 선정사에 머물도록 했다. 대사는 현종의 지시대로 선정사에 머물다 사천성으로 옮겨갔다. 대사는 당대에 선의 위상을 떨치고 있던 자주(資州)의 덕순사(德純寺) 당화상(唐和尙, 성이 ‘당’씨)이라고 불리는 처적(處寂) 선사를 찾아갔다(법맥을 보면, 4조 도신-5조 홍인-자주 지선-처적이다). 처적의 생몰연대는 대략 669˜736년, 648˜734년 등 정확하지 않다.

무상이 덕순사(현 寧國寺)로 찾아가 처적선사 뵙기를 간곡히 청했으나 처적은 병을 핑계로 무상을 만나주지 않았다. 무상은 며칠 동안 제자로 받아들여줄 것을 스승에게 간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무상은 자신의 구법 의지를 보여주고자 소지공양(손가락을 태우는 것인데, 수행의 의지를 보이는 뜻)을 감행했다.

무상은 2년간 덕순사에 머물며, 처적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무상은 가르침을 받는 와중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 천곡산(天谷山, 현 四川省 靑城山)으로 들어가 두타행을 하다가 다시 덕순사로 돌아와 처적으로부터 가사와 법을 받고 ‘무상(無相)’이라는 호를 받았다. 

무상대사가 처적선사에게 가사를 받고 다시 천곡산으로 돌아가 수행하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 <역대법보기>에 이렇게 전한다. “김화상은 가사를 받고 천곡산 바위굴에 숨어 버렸다. 풀을 엮어 옷으로 삼고 음식을 줄였으며, 음식이 없어지면 흙을 먹을 정도로 수행했다. 맹수들이 무상대사에게 감화를 받아 그를 호위해주었다. 무상대사는 이런 신이한 영험이 있었다.” 

또 <송고승전>에는 무상대사의 수행에 관해 이렇게 전한다. “무상대사는 한번 선정에 들 때마다 5일간 삼매에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렸는데, 두 마리의 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아 무상대사 앞에 나타났다. 무상대사는 벌거벗은 채로 짐승들에게 보시하려 하였으나 짐승들은 무상대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냄새를 맡으며 둘레를 돌다가 돌아갔다. 대사가 밤중에 좌선하는 와중에 호랑이의 수염과 털을 눌러 손에 잡히기도 할 정도였다. 무상대사의 산 속 수행이 오래되어 갈수록 옷이 다 헤지고 머리가 길어 사냥꾼들이 그를 이상한 짐승으로 여기고 활을 쏘려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무상대사는 마을 부근 성에 들어와서도 낮에는 무덤 사이에 머물렀고, 밤이면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는 등 두타행을 했다. 이에 대사를 존경하며 섬기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다. 또 어떤 사람은 대사를 위해 무덤 옆에 사찰을 지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역대법보기>와 <송고승전>에서는 무상을 신이한 고승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점은 무상이 중국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불교신문3372호/2018년3월3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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