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서 ‘대한독립만세’ 목놓아 외친 젊은 스님들

만해스님 범어사 내려와 논의
지방학림 명정학교 학생 참여
동래 장날 기해 두 차례 봉기
금정산, 금정중 ‘유공비’ 건립

부산 불교계는 3월1일을 맞아 금정산 범어사 순환도로 인근에 있는 ‘3.1운동 유공비’ 앞에서 ‘3.1운동 기념식 및 재연행사’를 갖는다. 사진은 2017년 행사 모습

금정총림 범어사. 신라 문무왕(678년) 시절 의상대사가 창건한 도량으로 해동화엄십찰(海東華嚴十刹) 가운데 하나이다. 부산광역시 금정산 범어사 순환도로인 범어사로를 내려오다 보면 ‘삼일운동유공비’가 눈에 들어온다. 1919년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갈 당시 범어사 지방학림 학인들을 중심으로 전개한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비이다. <편집자>

“삼엄한 총검도 정의(正義)의 전진을 막지 못하였고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옥고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으니 그 정기(正氣) 길이 이 땅에 빛나리라.” ‘삼일운동유공비’ 내용 가운데 일부이다.

1919년 2월 하순. 만해(萬海)스님이 범어사에 왔다. 당시 주지 성월(惺月), 담해(湛海), 이산(梨山) 스님과 회동해 거족적으로 봉기할 예정인 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영남지역 중심사찰로 지방학림을 운영해 젊은 승려와 학생들이 다수 재학하고 있어 범어사는 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적격이었던 도량이었다.

만해스님을 만난 범어사 스님들은 지방학림에 다니는 김법린(金法麟), 김영규(金永奎), 차상명(車相明), 김상기(金相琦), 김한기(金漢琦) 등 7명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만해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무렵 만해스님은 불혹을 넘긴 41세였다. 1919년 2월 10일 최린을 만나 3·1운동 계획을 들었으니, 범어사를 방문한 것은 그날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김법린 등 7명의 범어사 청년승려들은 곧바로 서울로 상경했다. 3.1운동 전날 만해스님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 받은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이 인사동에 있는 범어사 포교당에서 모임을 갖고 역할 분담을 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3.1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후 김법린과 김상호는 만해스님 지시에 따라 범어사로 내려왔다. 삼엄한 경계를 피하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로 변복했다. 이날이 3월4일이었다. 또 다른 자료에는 3월 3일 오후 양산 물금역에 도착해 범어사로 이동했다고 한다.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범어사 스님과 지방학림 학생들은 지역에서도 대대적으로 시위를 펼치기로 뜻을 모았다. 일경(日警)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세를 규합해 나갔다. 우선 동래읍 장날인 3월 19일에 거사를 하기로 했다. 스님과 청년들이 앞장서고 주민들이 동참하기 위해선 장날이 적당했기 때문이다.

거사를 며칠 앞둔 3월 17일. 지방학림과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명정학교(明正學校) 졸업생들의 송별회가 열렸다. 회합 장소인 범어사에는 40여명이 모였다. 나라 잃은 설움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젊은 스님과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영규,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김봉환(金奉煥) 등이 발언을 하고 대중이 동의했다. 축사를 한 김영규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고창(高唱, 소리 높여 외침)했다고 전한다.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18일과 19일 동래장날을 기해 두 차례나 독립만세 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당시 만세운동이 일어난 동래시장 입구.

송별회를 마친 후 밤을 이용해 동래읍으로 향했다. 눈에 띄지 않게 길은 피하고 선리(仙里, 지금의 금정중 인근) 뒷산과 동래 향교(鄕校) 뒷산을 넘어 읍내에 잠입했다. 3월 18일 오전 1시경 범어사 동래포교당(지금의 부산 법륜사)에 도착했다. 장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거사를 준비하고 단행하기에 가장 적합했다. 

시장기를 달래려고 시장에서 곶감 5접을 사와 먹고 있을 때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 20여명이 법륜사에 들이 닥쳤다.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吳啓運)의 밀고가 있었던 것이다. 일경은 김영규,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을 검거해 동래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 대중은 강제로 해산 시켰다.

이때만 해도 일경은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주동자를 검거하고 해산시키면 더 이상 아무 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한 듯하다. 하지만 포교당이 아닌 곳에 또 다른 이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지방학림에 다니는 허영호(許永鎬) 집이 장터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1000여장의 독립선언서와 함께 대형 태극기 한 개, 소형 태극기 1000여개를 준비한 상태였다.

강제해산 당한 그날 저녁 동래읍 서문 인근에서 ‘한국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근우(李根雨), 김해관(金海管), 김재호(金在浩), 박재삼(朴在森), 신종기(申鍾驥), 윤상은(尹相殷), 박영환(朴永煥) 등 40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동래시장까지 이르렀다.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우리 고장 범어사에서도 젊은 학도들이 제세의 사명을 자각하고 구국의 비원(悲願)을 불전에 맹세하며 나라와 자유 없는 곳에 진정한 불법도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정신으로 3월 18일 동래시장 등에서 독립선언문을 산포(散布, 흩어져 퍼짐)하고 만세소리를 높게 외치니 운집한 군중도 동조하였다.” 이날 밤에 전개된 기습시위는 일경이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첫날 시위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자신감을 얻은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은 애초에 잡았던 19일 더 큰 규모의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3월19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미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한 허영호는 윤상은(尹相殷), 이영우(李永雨), 황학동(黃鶴東) 등을 통해 “일사는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一死莫如’得自由]”는 내용을 담은 격문 수백장을 동래시장 입구에서 배포했다.

19일 오후 5시. 동래시장 남문에 집결한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 수십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한 시간 뒤 또 다른 학생 수십명이 시장에 모여 같은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참여한 학생 가운데 명단이 알려진 것은 이근우(李根雨), 양수근(梁壽根), 김영식(金永植), 오시권(吳時勸), 황만우(黃滿宇, 이상 오후 5시 시위), 김해관(金海管), 김재호(金在浩), 최응권(崔應勸, 이상 오후 6시 시위) 등이다.

깜짝 놀란 일경은 무자비한 방법으로 참가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3월19일 동래시장 만세운동으로 연행된 인물은 100여명에 이르며 3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김영식과 박재삼은 집행유예 6년, 다른 참가자들은 징역 6개월에서 2년을 언도받고 부산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핵심 주동자인 김법린은 만세운동후 검거망을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탈출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을 빌미로 일제는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를 강제해산시켰다. 지방학림은 범어사 승가대학(강원)으로, 명정학교는 부산 금정중학교와 청룡초등학교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이 어둠을 이용해 동래읍으로 향했던 선리 뒷산 인근에 자리한 금정중학교에는 1970년에 세운 또 하나의 ‘3·1운동유공비’가 그날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비문 일부는 다음과 같다. 

“금정산 기슭 호국의 전통이 스며 있는 수월도량에서도 제세의 사명을 통절히 자각하고 구국의 비원을 불전에 맹세하며 분연히 일어서니 이는 곧 나라와 자유 없는 곳에 진정한 불법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정신의 발로라 할 것이요 … 모진 고문과 가혹한 옥고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음은 나라와 자유를 찾으려는 우리의 결심을 저들이 꺾지 못함이라. 아아 그 뜻 장할시고 세월이 흘러 님들은 가고 또 가고 거룩한 위국정신과 훌륭한 그 업적은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후생들의 가슴에 불명의 빛이 되고 엄숙한 교훈이 될 것인 바…”
 

동래시장에서 궐기하기 위해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이 야음을 틈타 모인 동래포교당. 지금의 법륜사 모습이다.

범어사 만세 운동으로 재판 받은 인물 차상명(車相明),김한기(金漢琦),김상기(金相琦),정성언(鄭聖彦),김해관(金海管),양수근(梁壽根),이근우(李根雨),박재삼(朴在森),허영호(許永鎬),최응권(崔應勸),김태준(金泰俊),박창두(朴昌斗),이달실(李澾實),박정국(朴楨國),윤상은(尹相殷),김상헌(金祥憲),손태연(孫泰淵),김충념(金忠念),황학동(黃鶴東),신종기(申鍾驥),오병준(吳柄俊),오점술(吳點述),김영규(金永奎),이영우(李永雨),박영주(朴永珠),지용준(池龍焌),양춘도(楊春到),손군호(孫君浩),황만우(黃滿宇),김영식(金永植),오긍상(吳亘祥),김재호(金在浩),오시권(吳時勸),박영환(朴永煥)

참고자료 <범어사>(불교사회연구소),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임혜봉 지음, 민족사),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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