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카대왕 아들 마힌다 정착 ‘테라와다(상좌부불교) ’ 받아들인 최초 국가

해탈도론 청정도론 등 편찬…불교연구 꽃피워 
빠알리 삼장 처음 문자로 기록 ‘전법 큰 역할’

스리랑카 불교는 기원전 3세기 인도에서 전래됐다. 당시 인도의 왕이었던 아소카대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는 기원전 236년 음력 3월 보름, 다섯 명의 비구, 재가자 한 명과 함께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당시 사냥을 나왔던 스리랑카 국왕 데와남삐야띳사 왕은 미힌탈레(Mihintale)에서 마힌다 장로와 처음 만났다. 이때 국왕은 마힌다 장로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데, 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전에 스리랑카가 불교를 받아들인 적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스리랑카에 세 번 오셨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성도한지 9개월째 되던 날 마히양가나(mahiyangana)에 오셨던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성도한지 8년이 되었을 때 스리랑카의 나가 민족 분쟁을 막기 위해 나가디파로 오셨고, 세 번째는 나가들의 초대로 캘레니야로 오신 후 설법을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부처님 재세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후원을 받아 불교가 구국불교로 확고히 뿌리내려 성장한 것은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에 온 이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스리랑카는 새롭게 바뀌었다. 힌두교를 비롯한 민속 신앙을 믿었던 스리랑카 민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로 개종했다. 데와남삐야띳사왕의 아들인 아릿타 왕자가 최초의 비구가 되어 스리랑카에 비구 상가(승단)를 설립하고 마힌다 장로의 여동생인 상가밋따 장로가 보리수나무를 모시고 오자 스리랑카왕의 아내도 출가하면서 비구니 상가(승단)도 출범했다. 

문제는 출가자는 계속 늘어나는데 머물 곳이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이자 테라와다 교단인 대사파(Mahvihra)종단이 수도 아누라다뿌라시에 생기게 됐다. 이는 스리랑카 불교가 테라와다(Theravada, 上座部) 불교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아누라다뿌라 시대는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며, 번성과 동시에 분열도 있었던 중대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스리랑카 교단은 이후 대사파와 무외산사파, 기타림사파로 분열돼 끊임없이 대립을 계속했다. 스리랑카 왓따가마니아바야왕은 인도의 침략을 피해 피신하던 중 마하띳사 장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왕은 장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무외산사를 건립하여 하사했다. 그러나 왕과의 잦은 접촉을 갖는 마하띳사 장로에게 불만을 품은 대사파의 스님들은 마하띳사 장로를 대사파로부터 축출했고 이에 대한 불만으로 무외산사파와 대사파 분열이 형성된 것이다. 무외산사에서는 대사파와 달리 대승의 보살 숭배 사상을 받아들이고, 인도문화와 불교의 유입과 함께 점성술, 시학, 의학, 문법, 논리, 드라마, 미술 등도 수용했다. 

스리랑카 <해탈도론>, 상좌부 불교의 대표서라고 할 수 있는 <청정도론> 등이 붓다고사에 의해 편찬되면서 불교 연구의 가장 찬란한 꽃이 스리랑카에서 피었다. 결국 스리랑카는 인도로부터 테라와다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국가인 동시에 빠알리 삼장을 처음 문자로 기록하고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석서 등을 연구하여 오늘날 전 세계인들에게 붓다의 말씀을 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불교신문3370호/2018년2월24일자] 

담마끼띠스님  평택 마하위하라센터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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