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거울은 온갖 모습 그대로 드러내

‘내 것이라는 집착’ 사라지면 
마음이 저절로 맑고 깨끗해져
‘부처님 지혜’도 보는 힘 생겨

그 어디에도 집착하여 머물 곳이 없는 마음이 부처님 마음인데, 이 마음은 집착하는 것이 없으므로 어떤 경계에도 오염되지 않습니다. 오염되지 않는 이 마음이 본디 맑고 깨끗한 자신의 성품입니다. 5장에서는 맑고 깨끗한 자신의 성품에서 이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원문번역: 문) 몸과 마음은 무엇으로 봅니까. 눈으로 봅니까 아니면 귀로 또는 코로 봅니까. 아니면 몸과 마음으로 봅니까. 답) 보는 것은 이처럼 여러 가지로 볼 것이 없다. 

문) 이처럼 여러 가지로 볼 것이 없다면 무엇으로 봅니까. 답) 자신의 성품에서 본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맑고 고요하기 때문이다. 맑고 고요한 그 바탕에서 보는 힘이 나온다. 

강설: 우리는 보통 눈으로 본다고 합니다. 눈으로 보는 순간 온갖 생각들이 함께 일어납니다. 이 생각 속에는 늘 번뇌덩어리 ‘나’라는 것이 잠재되어 괴로움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중생의 모습인데, 집착하여 분별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허깨비라 하여 이런 분별이 다 사라진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무엇으로 이 세상을 봐야 합니까. 눈으로 봅니까 아니면 귀로 또는 코로 봐야 합니까. 아니면 이 몸과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온갖 집착이 다 끊어진 자신의 성품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떨어진 자신의 성품은 맑고 깨끗하여 그 바탕에서 성스런 빛이 뻗어 나오니, 이 광명이 모든 것을 낱낱이 비추어 환히 아는 힘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지혜입니다.

원문번역: 문) 청정한 바탕은 얻을 수 없는 것인데 보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답) 비유하자면 밝은 거울 속에 아무런 모습이 없더라도 사물을 비추면 온갖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밝은 거울은 어떤 모습에 꽂혀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경계에 오염되지 않으므로 헛된 마음이 생기지 않아 ‘내 것이라 집착하는 마음’만 사라지면, 저절로 그 사람의 마음은 맑고 깨끗해진다. 그 마음이 청정하므로 여기서 보는 힘이 생긴다. <법구경>에서 “허깨비와 같은 모든 집착이 사라진 마지막 공(空) 텅 빈 마음에서는 치열하게 불꽃처럼 벌어지는 온갖 법들이 선지식이다”라고 하였다.

강설: 맑고 깨끗한 마음 바탕은 어떤 모양으로 그려낼 수도 없어 이름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보는 것이 있겠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밝은 거울의 비유입니다. 먼지 없는 밝은 거울 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으므로 거울은 그 앞에 비치는 온갖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깨달은 사람은 경계를 집착하여 시비 분별하는 오염된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밝은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텅 빈 마음이 대상경계를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니, 거기서 치열하게 불꽃처럼 벌어지는 온갖 법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의 빛으로 치열하게 드러나는 이 법들이 모두 빠짐없이 부처님의 지혜이니, 이것이 선지식이 되어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이란 중생의 온갖 집착이 사라진 텅 빈 마음에서 나오는 부처님의 지혜를 쓰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수행을 하였다거나 수행하는 모습만 지니고 있다거나 수행자가 높은 직책을 맡고 있다고 해서 선지식이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수행과 법이 없이 선지식 노릇을 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법을 파괴하는 큰 죄를 짓는 사람이라 하여 청정 승가에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불교신문3368호/2018년2월10일자] 

원순스님 송광사 인월암 삽화=손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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