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수호’…최초 문자경전 탄생

‘4차결집’…스리랑카 알로카위하라 사원에서 
암송으로 전하던 부처님 말씀 팜리브잎에 새겨

빨리어 경전을 적는 일은 상좌부불교 역사에서 네 번째 결집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 시점까지 붓다의 말씀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구전전통’에 의해 전해져 왔다. 붓다의 말씀은 5세기 동안 거의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결집 이후 붓다의 말씀을 정리하고 다르마-비나야(불법-계율)를 기록하는데 몇 명의 아라한과 그 제자들이 할당됐다.

비나야(계율)에는 우팔리 존자와 그 제자들이 할당됐는데, 디가(Digha), 상윳따(Samyutta) 그리고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āya)는 각각 아난다 존자, 마하카쌰파 존자 그리고 아누룻다 존자가 할당됐다. 맛찌마니까야(Majjhima-nikāya)는 이미 열반한 사리풋타 존자의 제자들이 맡게 됐다. 그리고 점차 이러한 경전을 숙지하게 된 집단이 그 경전에 대해 전문성을 갖추게 됐다.

빨리어 경전의 정법수호라는 사명을 가진 그들의 전문성은 스리랑카 지방에 있는 알로카위하라(Aloka vihāra) 사원에서 경전을 문자화하는 ‘경전결집’으로도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보면 1차 결집으로부터 경전은 암송으로 내려져 왔다. 경장과 율장으로 비롯되어 3차 결집에서 논장까지 삼장을 암송했다. 빨리어로 된 이 암송방식이 승려들의 엄격한 능력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다 암송으로 내려온 경전이 스리랑카에서 문자로 옮기게 되는데, 암송 중심이었던 붓다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배경은 다소 복잡하다. 그만큼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붓다의 말씀을 보전하고 있는 승려들이 전쟁, 가뭄 같은 어려운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 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웃 인도로 건너가게 되었으며,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한 승려들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자신들이 합송하여 보전한 경전을 보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글을 보존하기 위해 ‘푸스골라(Puskola)’라는 것을 사용했는데 이 ‘푸스골라’는 나무 껍데기, 나무, 흙, 은, 동, 나무 잎 등을 말한다. 글은 쓰는 것 보다 주로 새기는 방식이 많았다. 빨리어는 활자 없이 소리만 있기 때문에 빨리어의 음을 싱할라 문자로 패엽(팜리브잎을 말린 것)에 적었다.

이렇게 남겨진 최초의 경전이 바로 패엽경이다. 패엽경은 야자나무 잎을 넓이 5cm, 길이 45cm 크기로 잘라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서 글자를 쓰기 좋은 형태로 만들고 나서 구멍을 뚫는다. 다음은 패엽은 3시간가량 솥에 찐 다음으로, 나무에 걸어 말리고 부비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나뭇잎은 끈기가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형태로 만들어 진다.

패엽이 만들어 지면 하나씩 꺼내 글씨를 새기기 시작한다. 글씨는 점필이라고 하는 송곳의 손잡이 부분에 칼이 달린 독특한 도구를 사용한다. 송곳 부분은 글씨를 쓰기 위해, 칼날 부분은 재료를 좀 더 매끄럽게 다듬는데 이용된다. 이와 같이 준비가 완료되면 본격적인 사경 작업에 들어간다.

다음으로 송곳을 가지고 패엽에 깊이 흠이 파이도록 경문(經文)을 쓴 다음 그 위에 잉크를 부어 문지르고 깨끗한 천으로 닦아 내면 파진 홈에 잉크가 스며들어 글씨가 새겨진다.

이렇게 완성된 패엽경을 다시 밀가루로 문질러 표면을 매끄럽게 마무리 하여 여러 장을 함께 실로 묶어 한권의 경전으로 완성하게 된다. 다시 꺼내서 읽을 때는 아래에서부터 위로로 읽는다.

이렇게 패엽경으로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이 어느 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불교교리를 배우고 붓다의 말씀에 대한 능숙함을 갖추게 된다.

[불교신문3368호/2018년2월10일자] 

담마끼띠스님 평택 마하위하라센터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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