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세계를 무대로 한바탕 멋지게 살라”

 

“법문은 일생생활에 다 있어
밖에서 불교ㆍ진리 찾지 말라”
엄한 경책, 자비로운 포용력
알기 쉬운 부처님의 길 안내

선교겸수 이사원융 본지풍광 
‘삼소굴’ 책으로도 널리 전해  

시(詩), 서(書), 화(畵), 그리고 차(茶)까지 두루 갖추었던 경봉스님은 ‘영축산 도인’이요, ‘통도사 군자(君子)’라고 칭송됐다. 스님이 남긴 유필과 유묵은 아직도 대중들에게 법음을 들려주고 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이 사바세계에서 우리가 나왔는데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바탕 멋들어지게 하고 가자. 늘 근심 걱정만 하고 살 바에야 무엇하러 어머님으로부터 나오기는 나왔느냐 말이다. 좀 근심스럽고 걱정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다 털어버리고. 우리 인생이 기껏 살아봐야 백년을 더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늘 쾌활하고 낙관적이고 활기찬 생활을 해야 한다. 근심 걱정은 물질 아니면 사람에 관한 것 외엔 없는데 설사 좀 근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불타의 그 초월한 정신에 계합하여 인생의 노선과 인새오간을 확립해야 한다. 

여태껏 생활해온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 관념에 잘못이 있으면 영 비워버리고 바르고 참되고 활발한 산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법문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 다 있으니 일상 생활하는 밖에서 진리를 찾지 말고 불교를 찾지 말아라.” 

경봉당(鏡峰堂) 정석(靖錫, 1892~ 1982)대종사는 ‘사바세계를 무대로 한바탕 멋지게 살아라’고 후학들에게 일러 주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일깨워주었다. 부처님 법을 만나 불자로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듣기 쉽게 자상히 일러주었다. 출가수행자에게는 당신의 수행을 바탕으로 엄한 경책과 자비로운 포용력으로 부처님 길을 안내했다. 

스님은 불자들만의 스승이 아니었다.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의 아픔과 고뇌를 보듬어 전 국민의 큰 어른이었다. 법상에서 법문을 할 때는 부처님말씀과 성현의 가르침이 큰 물줄기 같이 쏟아져 나왔고 조사 스님들의 선어(禪語) 선구(禪句)가 내리 꽂히는 폭포수처럼 터져 나와 듣는 이의 가슴을 통쾌하고 시원하게 해 주었다. 당신의 한 삶은 멋지고 여유롭고 풍요했다. 한 세상 태어나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스스로 다 하였기에 그처럼 멋지고 당당하고 한가로웠으며 거목처럼 큰 그늘을 후학들에게 드리우고 있다. 

경봉스님은 1892년 4월9일 경남 밀양군 부내면 계수동에서 광산(廣山) 김씨 영규(榮圭)를 아버지로 안동 권씨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속명은 용국(鏞國)이다. 1898년 밀양군 죽하재(竹下齋) 강달수(姜達壽)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06년 8월 어머니를 여의고 인생무상을 느껴 출가의 연(緣)을 맺었다. 스님 나이 15살 때다. 

1907년 6월 양산 통도사에서 성해(聖海)스님을 스승으로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 1908년 9월 청호(淸湖)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1년 3월 명신(明新)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4월 해담(海曇)율사에게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아 지녔다. 1912~1914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를 수료하고 만해 한용운스님에게 화엄을 수학했다. 이 인연을 바탕으로 경봉스님은 통도사에 화엄산림을 개설했다. 통도사 화엄산림은 2017년 47회에 이르고 있다. 1915년 스님 나이 24세 때 참선수행에 나서 양산 내원사, 합천 해인사, 금강산 마하연 등에서 정진했다. 1917년 8월 스님은 통도사 마산포교당 포교사로 갔다. 거기서 언론인이자 우국지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과의 교분은 나라를 사랑한 스님의 기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안수정등’ 법문

1916년 9월 각 지방 순회포교사가 되었다. 스님은 이 무렵 ‘안수정등’의 법문으로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 법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르침을 널리 알렸다. 안수정등(岸樹井藤) 법문은 이러하다. 

“옛날 어떤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술에 취한 코끼리가 쫓아왔다. 나그네는 놀라서 도망을 가다가 절벽에 있는 허물어진 우물을 만났다. 그는 급한 김에 우물 속으로 드리워진 칡넝쿨을 타고 내려가 숨었다. 그러나 칡넝쿨은 연약하여 오래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다. 우물 벽에 다리라도 의지하려 하니 사방은 온통 가시덤불이고 네 벽에는 독사가 한 마리씩 있어 발을 디딜 수 가 없었다. 할 수 없어 아래로 더 내려가려 하니 밑바닥에는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다시 위로 올라가려하니 이미 코끼리가 쫓아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나그네가 매달려 있는 칡넝쿨은 흰 쥐와 검은 쥐가 돌아가며 갉아먹고 있었다. 나그네는 ‘이제 죽었구나’하고 탄식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입속으로 달콤한 꿀이 다섯 방울 떨어졌다. 

나그네는 자기가 처한 위험한 상황도 잊고 그 꿀을 받아먹기에 정신이 팔렸다.

이 얘기에서 사막이란 우리의 일생길이고 술에 취한 코끼리가 쫓아온다함은 세월이 뒤쫓아 옴에 비유한 것이다. 칡넝쿨은 생사의 목숨줄이고 네 마리 독사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요 우물 밑바닥의 뱀은 지옥을 말하고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말한다. 다섯 방울의 꿀물은 오욕락에 비유한 것이다. 즉 사람은 곧 죽을 줄도 모르고 오욕락을 탐한다는 것이다.” 

경봉스님은 이 ‘안수정등’ 법문을 그림으로 그려 걸어놓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을 부처님 법으로 이끌었다. 

1925년 통도사 양로염불만일회를 창설하고 회장으로 30년간 봉사했다. 이 염불회는 상좌 원산스님(통도사 백련암)이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7년 12월13일 오전2시30분 스님은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용맹정진하던 중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경봉스님은 극락선원에 화엄경산림법회를 개설했다. 화엄산림기간 중에도 스님의 화두타파 일념의 용맹정진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스님이 36세 때다. 

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現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

“내가 나를 세상 모든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보이네/ 허허, 이제 만나게 되어서 의혹이 없으니/ 우담발화 빛이 온 세상에 흐르네”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깨달음의 노래다. 

1930년 4월 건봉사 두마포교당 포교사를 지내고 1932년 2월 통도사 전문강원 원장에 취임, 11월 울산 백양사 주지, 1935년 9월 통도사 주지, 1939년 10월 양산 내원사 주지, 1941년 3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탐구원(현 선학원) 이사장, 1949년 4월 통도사 주지(재취임), 1953년 11월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 등을 역임했다. 1967년 4월 서울 파고다공원에 만해 한용운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1973년(82세) 매월 첫 일요일 정기법회를 열어 90세까지 법좌에 올랐다.

1982년 7월17일 오후4시25분께 극락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시자가 물었다.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경봉스님은 웃으며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했다. 스님의 임종게다. 법랍 75년, 세수 91세.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다비는 통도사 다비장에서 봉행했다. 스님의 탑과 비는 1985년 6월26일 통도사 부도전에 세웠다. 비문은 건국대 이영무 교수가 짓고 서예가 원중식 씨가 썼다.

 ‘삼소굴’은… 

전 극락암 주석처이자 책
법해·화중연화소식·일지
생애 전부이며 통도사 역사 

스님 열반 후 상좌 명정스님이 수집, 간직하고 있는 자료를 토대로 문도들이 힘을 보태 당신의 법어집과 서가집 등을 엮어냈다. 

‘법해(法海)’, ‘속(續) 법해’, ‘화중연화소식(火中煙火消息)’, ‘삼소굴일지(경봉스님이 1927년12월7일부터 1976년 4월2일까지 쓴 일지. 통도사의 역사이자 근·현대 한국불교사의 귀중한 자료)’, ‘선문묵일점’, ‘원광한화’ 등이 있다. 

2012년 스님의 열반 30주기를 맞아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는 특별전을 열어 스님을 기렸다. 

<삼소굴>(三笑窟, 통도사 극락암에 있는 경봉스님이 생전 머물던 곳)이라는 이름으로 낸 책에는 스님의 탄생부터 수행, 오도, 교화에서 열반까지의 과정을 시대 순으로 나누고 삶의 흔적, 일상의 기록, 당대 고승들과의 교유, 스님의 법향 등을 각 테마로 나누어 각종 유품과 일기, 편지, 유물 등 약 350여점을 담았다. 또한 김광식 교수(동국대 연구교수)의 글 ‘수행과 보살행의 전범-그 치열한 속살을 엿본다’와 강석근 교수(동국대 교양교육원)가 쓴 ‘시(詩)로 읽는 경봉 정석선사의 생애와 수행을 실어 스님의 한 평생 삶과 수행정신을 알게 해준다. 

경봉스님은 한시(漢詩)와 시조와 필묵(筆墨)에도 조예가 깊었다. 스님의 글씨는 도필(道筆, 도의 필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누구라도 와서 “스님, 먹 묻은 종이 한 장 주이소”하면 허허 웃으며 선뜻 붓을 잡은 스님. 80넘은 노구(老軀)에도 여름엔 냉수마찰 겨울엔 건포마찰로 건강을 챙긴 스님이다. 

극락선원은 남녀노소 비구 비구니 할 것 없이 누구나 와서 정진하는 수행공간이었다. 당신의 너른 품으로 이들을 안았다. 선(禪)과 교(敎)를 두루 갖추고(禪敎兼全) 이치(理)와 일(事)에 막히지도 걸림도 없이 한 생을 멋지게 산 경봉스님. 당신의 법향은 오늘도 영축산을 감싸고 호호탕탕한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드날리고 있다. 

[불교신문3362호/2018년1월20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