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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 (2018).4.1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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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바닥 머리카락 줍는 일이나 삼천배나 똑같죠”

마음이 나이만큼 안 늙어서

이형순 지음 / 불교신문사

4년 만 소설 낸 이형순 작가
33가지 옴니버스식 엽편소설
번뇌만발 현대인에게 전하는
소소하지만 톡 쏘는 이야기…

기계·지식·권위적 불교 벗고
작가 특유 성찰 시선 빼곡히

이형순 작가가 4년여 만에 소설집 <마음이 나이만큼 안 늙어서>를 냈다. 지난 12월26일 그가 오랜 세월 불목하니로 일해 온 일터 조계사에서 만났다. ‘너무 흔하고 익숙해서 특별해져 버린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책은 기계화된 불교, 권위적인 불교, 지식적인 불교를 벗어던진 작가 특유의 성찰과 시선이 맛깔스럽게 담겨 있다. 김형주 기자

# scene 1

바닷바람이 그물 뚫듯 아리고 매서운 섬마을에 신새벽을 깨우는 두 사람이 있다. 도량석 지각쟁이 열아홉 사미승과 절 아랫마을 풀꽃교회서 새벽종 치는 아흔한살 종지기 노인이다. 둘은 나이로 치면 무려 72년 터울, 어린 사미승은 노인에게 증손자뻘이다. 눈과 귀가 어두운 종지기 노인이 매일 새벽 지팡이를 안내견 삼아 집에서 교회 종탑까지 가다보면 으레 용궁사 앞을 지난다. 이때쯤이면 새벽 4시가 넘어가는 시간. 틀림없이 도량석 도는 스님의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담 너머 낭랑하게 울려 퍼져야 할 때다. 한 달에 두어 번 그놈의 ‘잠귀신’ 때문에 도량석이 안 들리는 날에 노인은 도량석 스님이 거처하는 문간방 앞에서 헛기침으로 기색을 주거나 지팡이로 문을 두드린다. 풀꽃교회 종소리가 시작될 즈음, 도량석을 끝낸 작은 절 용궁사도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새벽예불을 시작한다. 날마다 잠에 고프고 돌아서면 허기에 시달리는 19살 사미승, 잠은 갈수록 줄고 입맛은 맹탕이 돼가는 91살 종지기 노인. 두 사람은 세상만물을 깨우고 신에게 첫인사를 드리는 막중한 소임을 갖고 살지만 단 한번도 마주치진 않는다. 사미승은 새벽잠 깨워준 종지기 할배에게 알면서도 감사인사를 않는다. 다만 햇살이 흐드러지게 좋은날, TV를 켜놓고 낮잠을 혼곤하게 자다가 홀로 잠이 깰 때면, 91살 종지기 노인은 불현 듯 19살 사미승을 만나러 가고 싶어진다.

# scene 2

말기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초로의 여성 은복녀는 온종일 병원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린다. 무심화라는 법명으로 절에 다녔던 그녀는 병석에 누워 낭랑한 목탁소리, 짙게 타는 향내음, 특히 번쩍번쩍 닦인 놋쇠 그릇에 수북이 담긴 사시마지를 보고파한다. 뚱딴지같이 불전에 올렸던 사시마지를 한 수저라고 떠먹으면 병에 차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정기적으로 병실을 찾아주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수녀님들. 주기도문을 마치고 천주교 신자 환우의 별스럽지 않은 말에도 어깨를 쳐가며 함께 웃어주는 수녀님들 모습은 언제 보아도 부러운 장면이다. 병의 차도를 묻는 수녀님의 일상적인 말 한마디에도 가슴에 온기가 피어오르고 애잔한 물기가 번지는 은복녀다. 어느날 병실에 한 홀아비 남자가 입원을 했는데 알고 보니 스님이었다. 부모없는 아이 다섯을 거둬다 키운 스님이었다. 다섯 동자승 중 가장 어린 막내는 아직 주지 스님이 엄마다.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주지 스님의 팔을 빼앗아 기어이 베개를 만들고 나서야 잠이 들 정도로 어리다. 무심화 보살 은복녀는 다섯 동자승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동자승들이 스님 아버지가 공양할 밥으로 사지마지를 가져온 날, 은복녀는 스님의 권유에 기다렸다는 듯 밥수저를 꽂았다. 사지마지 덕분일까, 은복녀는 임종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지 두 달 만에 병실을 걸어 나왔다. 은복녀는 이제 일요일만 되면 두 배로 바쁘다. 무심화 보살로 참석하는 사찰 일요법회와 천주교식 세레명 소피아로 찾아가는 성당. 죽는 날까지 은복녀는 부처님과 예수님 중 어느 한 분만 선택할 마음이 전혀 없다.

이형순 작가의 신간 <마음이 나이만큼 안 늙어서>에 수록된 단편 중 ‘91살이 19살에게’와 ‘두 남자와 살아야 하는 여자’ 대략 줄거리다. 불교가 좋아서 불교를 알려고 실제 삭발염의에 출가를 체험해보고 백일기도 삼아 108배 수행을 365일 쉬지 않고 하는가 하면, 사찰서 궂은일만 전담하는 이른바 불목하니로 수년째 살아가는 작가답게 서른세가지 스토리는 환상과 거품을 걷어낸 우리 삶의 민낯이 거침없이 드러나는 ‘명장면’들이다.

“수행을 해서 지혜가 커지는 만큼 거품과 환상도 커집니다. 너무나 평범하지만 거품에 취하거나 휘둘리지 않고 과잉 없이 포장 없이 살아가는 내 주변인들의 삶을 그렸습니다. 오직 내 발밑만을 보면서 섣불리 남을 계몽하려고 꾸미거나 하지 않는 이야기.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없지도 않을 우리들의 이야기, 너무 흔하고 익숙해서 특별해져 버린 이야기들이죠.”

‘홍어한테 신세지고 산지가 50년 된’ 홍어장수 팔십 노부부가 어린 아들을 집어삼킨 원망스런 바다를 생애 처음으로 찾아가서 함께 생을 마감하며 나누는 말. “난 참 행복하다고 안하요…. 난 저 세상 가서도 무서울 게 하나도 없소. 당신은 내 치마꼬리만 꽉 붙들고 따라만 오씨요. 알것소? 내 말 들리요?” 죽은 아버지의 빚을 상속받은 세 살배기 진수와 모태솔로로 혼기를 놓친 공양주 정선댁이 진수엄마라는 오해를 받으며 살아가다 콧물 훌쩍이며 하는 말. “세상은 남자 한번 안아보지 못한 여자가 아이를 낳고, 빚쟁이가 될 수 없는 아이에게 빚을 안기는 곳이거늘. 그래서 부처님의 천수천안이 그리운 것이여.” 평생 ‘아내바보’로 살아온 김천만 씨가 유방암으로 아내 젖가슴을 도려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수긍하지 않자 자식들에게 온갖 핀잔을 받다가 집에 와서 처음으로 마누라의 낡은 브래지어를 발견하곤 혼자 중얼댄다. “브래지어의 휘어진 와이어 철사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구나. 마누라의 젖가슴을 좋아할 줄만 알았지, 감싸고 보호해줄 줄은 몰랐던 미련거지발싸개밥통 같은 남편….”

이형순 작가의 이야기에선 유독 여성의 삶을 섬세하게 대변하고 지켜주는 듯하다. “엄마하고 45년을 함께 산 덕분일 겁니다. 우리 시대 어머님들은 비교적 욕도 잘하고 화도 참지 않는 듯하지만, 어디에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으로 살아가는 힘. 그 이해와 포용의 힘이 정말 대단하잖아요.” 그가 말한 ‘어머니의 마음’은 그가 날마다 향유하고 바라보는 ‘불법(佛法)’과도 연결된다. “불법을 알고 나서 ‘허상이 깨지는 기쁨’을 갖는다고 할까요. 하루에도 수없이 하는 헛말과 헛짓이 불법에 의지해 자각되지요. 엄밀히 말하면 내가 부처라는 믿음으로 자각의 힘이 생깁니다. 나의 허물이 자각되면 그야말로 홀가분해집니다. 찰나찰나 오롯하게 개운해집니다.” 책 곳곳에는 불교에 관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명쾌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중심을 잡는다. “본심(本心)을 믿으면 너나가 평화로워지고 살맛이 납니다. 불법은 모든 유정 무정에게 본심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 본심을 믿는 사람은 길 없는 길에서 방향이 생깁니다. 홀로 독방에 앉아 있어도 은은한 기쁨을 느낄 수 있죠.” 불법과 인연이 되고 나서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대목도 눈길이 간다.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의 선후는 있을지언정 생생하게 깨어있기만 하다면, 방바닥에 머리카락을 줍는 일이나 부처님 전 3000배나 똑같은 무게를 지닙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출가를 꿈꾸는 이 작가는 “고승이 되려고 출가를 하는 것도 아니요 관념적 편견이 아닌, 출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라며 “정법을 품고 이끌어가는 삶을 꿈꿀 뿐”이라고 말했다. “불교는 내가 일상에서 변할 수 있는 힘을 주지요. 수없는 경계와 판단에서 발원해놓고 찰나에 변화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분노하되 얼른 마음을 돌이킬 줄 알지요. 눈쌓인 산에 오르다 문득 오체투지를 하게 되고 경칩 전까지는 호주머니에 생쌀을 담아가서 배고픈 산짐승들 겨울양식도 공급해주고….” 그는 그렇게 용인 광교산 자락에서 큰 산의 숲 법문을 들으며 살아간다.

 

이 책은…

울다 울다 또 울다 웃게 만들어

이형순 작가는 MBC베스트극장 ‘복날이 온다’, ‘마을버스’ 등을 집필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포털 ‘다음(DAUM) 7인’의 작가전 선정작 장편소설 <날 버리면 그대가 손해>와 정치웹툰 <노공이산>, 소설집 <부처님 마을이 손바닥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불교신문을 비롯해 여러 불교잡지에 ‘번뇌가족’ ‘몽중희망’ ‘가가소소 산방’ 등을 간판으로 내걸고 재밌고 친근한 불교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유쾌하고 통쾌한 목소리로 들려줬다.

이번 책 <마음이 나이만큼 안 늙어서>는 사계절로 나눈 33가지 엽편 소설들이 옴니버스형식으로 실렸다. 각각의 스토리는 단절된 듯하지만 연결돼 있다. ‘꿈을 깨고 나면 환상임을 알고 크게 웃는다’는 작가의 사자후가 모든 이야기 속에 각기 다른 색깔로 스며있다. 특히 마지막장 겨울 편은 ‘믿습니까?’, ‘그 님을 몰랐더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맛’, ‘함박눈처럼’ 등의 테마로 불교의 참뜻과 지향점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밀도높게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일상이 수행인데다, 가급적이면 직접 체험을 하고 글감을 찾기 위해서는 강도 높은 취재로 마다않는 이 작가는 삶과 사랑, 죽음과 이별로 울고 웃는 우리네 삶을 가장 평등하고 무심한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한 편 한 편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면서 읽다보면 마지막 장까지 책을 손에서 도저히 놓기 어렵다.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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