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엊그제 불교신문에 보니까 “일상에서도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라”고 나와요. 화두가 뭐지요? 

깨달음을 위해 참구하는 문제로 
글 지을 때 머리말ㆍ말머리처럼 
일을 푸는 실마리라 할 수 있지

겨울안거 철이니 참선하는 분들은 뜨겁게 화두를 들고 있겠구나. 화두(話頭)는 ‘얘기머리’ 또는 말머리’를 가리키는 말씀이야. 글 지을 때 머리말처럼 일머리를 푸는 실마리라 할 수 있지. 
<벽암록>에 ‘남전 고양이 살해’란 말씀이 나와. 부처님이 하지 말라는 말씀 가운데 가장 으뜸에 서는 말씀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잖아. 그런데 부처님 제자가 고양이를 베어 죽이다니. 놀라운 일이지? 남전스님 제자들은 동쪽과 서쪽에 나뉘어 살았어. 그런데 고양이 새끼 한 마리가 동쪽에서 밥을 얻어먹고 서쪽에 가서 잠을 자곤 했나 봐. 하루는 이 고양이를 두고 스님들이 서로 입씨름을 벌였대. 어찌나 시끄럽게 싸우던지 남전스님이 한 손에는 고양이 새끼 목덜미를 움켜쥐고, 다른 손에는 식칼을 들고 서서 “어서 일러라. 제대로 이르면 이 고양이 살려둘 테고 잘못 이르면 죽이겠다”고 을렀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도 이르고 나서는 스님이 없었어. 어떤 말을 해야 고양이를 살릴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거지. 그러자 남전스님이 그만 고양이 목을 베고 말았대. 남전스님은 누가 나서서 “아이고, 스님 괜히 애먼 고양이 잡지 마세요”하고 낚아채기를 바랐을 텐데. 말에 매인 아둔한 스님들이 쩔쩔매는 사이에 애꿎은 고양이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구나.
이 일이 있고 나서 나들이 갔던 조주스님이 돌아와. 이 스님도 남전스님 제자야. 남전스님이 이 일을 털어놓으니까 조주스님은 짚신짝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갔어. 이걸 보고 남전스님은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하고 아쉬워했대. 
‘고무신 할배’ 윤구병 선생은 짚신을 벗은 맨발로는 걸을 수 있지만, 날고 기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무리 머리에 짚신을 신었다 해도 머리로는 한 발짝도 뗄 수 없다고 하셔. 때맞춰 쓸 몸짓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지. 그러면서 선생은 “(그 많은 스님 가운데) 고양이 목숨이 제 목숨과 같다고 여긴 이가 한 사람도 없다니”하며 가슴을 치셨어. 
화두를 들어 깨달으려는 까닭은 살고 살리려는데 뜻이 있어. 깨닫는 뜻이 ‘살림’에 있다는 말이야. 살림을 떠난 깨달음, 앎은 덧없어요. 여기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 헤아리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운전을 할 줄 알거나 헤엄칠 줄 아는 것처럼 몸에 배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가리켜. 
변택주 작가

변택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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