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에서 벗어난 고려시대 이색 동종

 

흔히 표현되는 비천상, 보살상 생략
종신크기에 비해 상·하단 과장 표현
6개 연뢰 표현된 독특한 요소 인정
지방문화재서 보물 1698호로 승격 

진주 삼선암 소장 동종 정면. 높이 64.2cm, 구경 37.6cm, 보물 제1698호.

이 범종은 지난호에 소개된 일본 토쿄(東京)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건통7년명(乾通七年銘: 1107년) 종과 마찬가지로 연곽(蓮廓) 안에 9개씩의 연뢰(蓮)가 표현되는 한국 종의 전형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이다. 건통7년명 종이 유일하게 한 연곽 안에 4개씩의 연뢰가 표현된 종이라 한다면 이 종은 그와 달리 6개만 장식되었는데, 두 종은 거의 유사한 시기에 만들어진 이례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종을 소장하고 있는 진주의 삼선암(三仙庵)은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 820-3번지에 위치한 작은 절이다. 그러나 원래 이 종은 1951년 지금의 진주시로 소재가 바뀐 진양군(晉陽郡) 수곡면(水谷面) 토곡리(士谷里)의 마을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개간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고 황수영(故 黃壽永) 선생이 <고고미술(考古美術)>1권2호 합집본1권(合集本1卷·1979)에 ‘고려 청동 범종의 신례–기1(高麗靑銅梵鐘의 新例, 其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바 있다. 

종이 발견된 밭 주위가 원래 폐사지(廢寺址)였던 곳으로 파악되지만 주변 지역에 대한 정밀한 조사는 별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오랜 기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5호(1972. 2. 12 지정)로 지정되어 오다가 필자에 의해 이 범종에 대한 가치가 정밀 조사가 이루어진 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시키게 되어 현재 보물 1698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범종의 외관은 고려 종의 양식적 특징을 잘 구비하고 있는데, 총고는 64.2cm이고 입지름이 37.6cm로서 크기 면에서는 중형 종 가운데서도 작은 편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옅은 녹색 빛이 감도는 삼선암 동종은 2단으로 이루어진 낮고 편평한 천판(天板) 위에 음통(音筒)을 휘감고 있는 한 마리의 용뉴가 머리를 숙여 입안에 있는 보주로 천판과 연결된 모습이다. 용의 머리 위로는 뿔과 갈기가 솟아있으며 뭉툭한 코앞으로 윗입술이 위로 말려 있다. 두 발 가운데 뒷발은 뒤로 뻗어 천판을 누르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 올렸지만 현재 발 앞쪽 부분이 반 이상 절단 탈락되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다. 

11세기 범종 요소가 남아있는 천판과 용뉴 음통.

용뉴는 세장하면서도 여의주로 천판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에서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장생사종(長生寺鐘: 1086년)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목 뒤로 연결된 음통은 가늘고 길게 솟아있는데, 대나무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줄기가 옆으로 갈라진 독특한 모습에서 연판문을 변화시킨 형태로 추정된다. 

이러한 음통은 앙복련의 연판을 중첩 배치하거나 화문 등으로 장식한 고려 전기 종에 비해 어딘지 새로운 형식화가 이루어진 느낌이다. 독특하게 천판의 외연을 둥글게 돌아가며 구획을 만들었으나 고려 전기 종에서 자주 보이던 천판 외곽을 두른 연판문대는 생략되었다. 대신 띠처럼 주물 자국이 남아있으며 중앙으로 가면서 불룩이 솟아있다. 아마도 용뉴 부분을 따로 붙여 주조할 때 생긴 흔적으로 판단된다. 

종신의 외형은 그 외형의 선이 상대(上帶)를 지나면서 불룩해지고 하부 쪽으로 내려가면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종구(鐘口) 쪽에 오면 갑자기 직선화된 모습이다. 이러한 종신의 외형과 아래쪽이 통통한 모습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녕4년명종(1058년)과 같은 11세기 종신의 외형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종에는 고려 종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종신의 비천상, 불 보살상과 같은 부조상(浮彫像)이 생략된 점도 매우 이례적인 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 시기 범종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천판 외연의 연판문대나 종신의 한쪽에 배치되는 위패형(位牌形)의 명문구도 생략되었다. 

종신의 문양 가운데 그나마 두드러지는 부분은 상, 하대와 당좌 부분이다. 상대와 하대는 거의 동일한 문양으로 처리되었는데, 상대는 종신에 비해 지나치게 두터운 편이다. 상대에는 만개한 연화문이 시문된 반원권(半圓圈) 문양을 방향을 바꾸어 가며 연속으로 배치하였고 이 반원권 사이를 잎이 촘촘한 당초문으로 연결한 모습이다. 

상대 아래 붙은 4개의 연곽은 역사다리꼴 형태이면서 다른 종에 비해 왜곡 현상이 심한 이유는 종신의 외곽이 급격히 부풀어진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나치게 커져 거의 종신 중단까지 내려온 모습이다. 연곽대에도 상대와 동일한 반원권 연판문과 당초문이 시문되었고 하대 역시 동일한 문양 구성을 보이고 있어 동일한 문양판을 반복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곽 내부 연뢰는 둥근 자방 주위로 4엽과 간엽(間葉)을 둔 돌기 없는 납작한 모습으로서 그 숫자도 9개에서 6개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종신 하대 쪽에 치우쳐 커다란 당좌(撞座)가 앞, 뒤로 배치되었는데, 당좌의 중앙에 작은 연과(蓮顆)를 둔 자방(子房) 주위로 만개한 4엽의 연판과 연판 내부에 화려한 꽃술 장식이 첨가된 4엽의 활짝 핀 연화문을 시문하였고 그 사이마다 간엽(間葉)을 두어 이 전체를 연주문 원권(圓圈)으로 두른 모습이다. 다른 문양에 비해 당좌가 더욱 고부조로 처리되었고 세부의 표현도 섬세한 편이어서 이 범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 되고 있다. 

이 작품은 명문을 기록하지 않아 정확한 제작연대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고려 범종은 지금까지 편년이 가능한 범종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가장 두드러진 양식적 차이가 바로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라 불리는 상대 위에 솟아난 장식대에 있다. 이 장식대의 유무를 중심으로 크게 고려 전기와 후기 종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 시기는 대체로 10세기 중반부터 12세기 후반까지가 고려 전기이고 13세기 초부터 말까지를 고려 후기로 나누고 있다. 

따라서 일단 삼선암 종은 아직까지 입상화문대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12세기 후반보다는 앞선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여기에 종신 상부에 입을 붙여 보주로 연결시킨 용뉴의 모습과 반원형을 이루며 높게 도드라져 있는 천판의 모습에서 오히려 11세기 범종의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 

고부조로 처리돼 섬세함이 돋보이는 당좌.

더욱이 건통7년명 종(1107년)과 마찬가지로 연뢰의 수를 단축시킨 새로운 변화의 시도는 이 두 종이 시기적으로 유사한 점을 시시해 준다. 종신의 일부에 약간의 구멍이 나있고 지하에서 출토된 관계로 약간의 손상과 부식이 남아있지만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처럼 삼선암 종은 비록 종신에 비천상이나 명문은 남아있지 않지만 출토지가 확실하면서도 6개의 연뢰가 표현된 독특한 요소를 지닌 고려 12세기 전반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음(餘音)

이 범종처럼 종신에 불보살상과 비천상 등의 부조상이 생략된 종이 몇 점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 니가타현(新瀉縣) 사도가시마(佐渡島) 죠안지(長安寺)에 소장된 고려 종으로서 이 종과 형식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주조에 있어 장안사 종은 훨씬 뛰어난 기술적 요소를 보여주는 반면에 삼선암 종은 화려한 문양을 지녔지만 그 세련됨이 어딘지 부족하고 서툴다. 여기에 제작자도 전혀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삼선암 종을 만든 장인이 당시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지방 장인 출신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불교신문3353호/2017년12월13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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