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긴 연휴기간동안 이곳저곳을 다녀왔다. 여러 풍물 이외에도 자연, 사람들의 모습 등 소소한 것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발견이 하나 있어 글로 남겨 본다. 

우선은 하루 날을 잡아 강화도의 사찰 두 곳을 둘러보고 왔다. 익히 알려진 보문사와 정수사를 차례로 돌고 왔는데,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여름의 기운이 가시지 않았지만, 마니산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기운은 가을의 차분한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두 사찰에 한참을 머물며 산과 바람 속에 담긴 자연스러운 부처의 법(法)을 느껴보고자 했다. 가파른 보문사의 계단 꼭대기에 오르면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관음상을 볼 수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관음상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세상의 온갖 번뇌의 소리가 저 미소 속에서 비로소 공(空)화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의 법(法)이 ‘자비’라는 실천과 한가지라는 것을 저 관세음의 미소가 가르쳐주고 있는 듯했다.

나흘 후쯤부터는 남독일과 이탈리아를 차례로 여행했다. 기독교의 나라들인 만큼 도처에 교화와 성당이 있었다. 특유의 엄숙한 분위기와 천구(天球)를 연상시키는 돔 양식의 높은 천장 등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관심을 끈 것은 성화와 성모상, 예수상 등에 묘사된 인물들의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관음상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이했기 때문이다. 모두 엄숙한 무표정이거나 번뇌하는 표정, 또는 슬픔에 잠긴 표정들이었다. 높은 천장과의 거리만큼이나 그들의 신념이 신에게 닿지 않기 때문인 것일까. 규모의 웅장함은 인간과 신 사이의 분명한 위계와 거리로 느껴졌고, 왠지 이런 거대한 신이 인간의 노력을 한없이 작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잡념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표정에 수심이 담긴 것일까.

하지만 방식은 달라도 자신이 믿는 종교적 대상에 대한 신념은 두 문화 모두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우리가 믿는 종교의 모습이 어떤 것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우리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종교든 공통의 한가지이다. 완전한 존재 앞에서의 겸손함,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자비’와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신문3347호/2017년11월22일자] 

김기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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