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한 조선 왕실 ‘천도도량’ 상징

흥선대원군 때 사세 확장 본격화
대웅전 건립 후 관음·명부전 세워 
신정왕후 등 왕실 극락왕생 기원
영철스님 등 수조각승 12명 동참

화계사 명부전에 봉안된 일괄 존상. 지장보살상부터 동자상에 이르기까지 조각가의 뛰어난 기량이 모든 작품에 반영돼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화계사 명부전 삼전패.

서울 수유리에 위치한 참선수행과 국제포교의 중심사찰인 화계사(華溪寺)는 ‘궁(宮) 절’로 불릴 만큼 조선말기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522년(중종 17)에 부허동에 있던 보덕암을 삼각산 화계동으로 이건한 이후 ‘화계사’라고 명명했다고 전한다. 화계사는 선조의 부친인 덕흥대원군(1530~1559) 집안과 관련이 있으나 화계사의 중창을 통한 사세 확장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때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화계사는 능침사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을 시작으로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1808~1890) 조씨와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1831~1904) 홍씨 등 고종대 내명부 비빈들과 상궁들의 후원이 많았다. 화계사 명부전은 당대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신정왕후 조씨가 ‘전국에서 가장 뛰어나고 영험한 지장보살상을 찾아 모셔오라’는 명으로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효정왕후 홍씨를 비롯한 고종(재위 1863~1907) 대 왕실 비빈들 역시 화계사 불사의 시주자인데, 현재 화계사에 남아있는 대웅전·명부전·대방(大房) 등은 모두 1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화계사와 왕실과의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1866년에는 흥선대원군의 후원으로 화계사가 크게 중창된 후 1875년 궁중에서 조성된 자수관음보살도가 화계사로 옮겨지는 것을 계기로 1876년 관음전 중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1878년에는 왕실의 비빈과 상궁들의 시주에 의해 명부전 불사가 원만하게 완료되었다. 화계사는 흥선대원군의 후원으로 대웅전이 건립된 이후 왕실 여인들의 시주로 관음전과 명부전이 건립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왕실의 천도도량(遷度道場)이 되었다.

화계사에 있는 여러 불교미술은 다른 절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1875년에 순종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왕실에서 조성한 자수관음보살도, 1649년에 황해도 배천 강서사에서 조성된 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소백산 희방사에서 1683년에 조성된 범종과 해남 미황사에서 1742년에 만든 운판, 그리고 1879년에 일본 교토에서 주문 제작해 가져 온 범종 등이 있다. 

희방사 범종과 미황사 운판은 1897년 10월에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 영친왕 이은이 탄생했기 때문에 왕자의 탄생을 기념하고 무병장수를 축원하기 위해, 당시 가장 뛰어난 두 작품을 화계사로 옮기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희방사 범종이 화계사로 이운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화계사 중건에 지대한 역할을 한 범운 취견스님이었다. 그는 특히 상궁들로 하여금 왕실과 관련된 사찰 불사에 왕실의 대변인 격으로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권선했던 스님이다.

흥선대원군과 화계사의 긴밀한 관계는 신정왕후 조씨를 비롯한 효정왕후 홍씨 등 왕실 비빈들이 화계사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첨정을 한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대원군과 협력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무력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은 1873년 실각한 이후 1875년에도 화계사 명부전 현판을 비롯해 다수의 현판을 화계사에 남겼다. 

1938년 안진호가 <화계사약지>를 편찬하면서 1880년 신정왕후 조씨가 강서사가 위치한 황해도 배천의 땅을 사서 화계사로 귀속시켰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는 <화계사명부전불량서>에서 1880년 봄에 신정왕후 조씨가 토지를 매입해 공양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에 근거해서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계사명부전불량서>에는 1876년 관음전 중수 이유와 강서사에서 지장보살상을 가져온 후 명부전을 짓게 된 사실을 밝히고 있다. 

<화계사약지>에 기록된 화계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25구 존상들이 1877년에 황해도 배천 강서사로부터 화계사로 옮겨진 내용은 지장보살상 조성기(1649년)에서도 확인된다. 조성기에 의하면 이 상들은 배천 강서사에서 조성되어 광조사에 봉안되었다가 다시 강서사로 옮겨진 후, 1877년에는 강서사에서 다시 화계사로 이안(移安)되었다. 아마도 광조사에서 강서사로 상을 옮기게 된 것은 광조사가 폐사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화계사 명부전과 왕실과의 관계는 <삼각산화계사명부전불량서>(1880)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신정왕후 조씨는 그의 남편이었던 익종 효명대왕 영가가 극락왕생하여 법왕의 지위로 다시 돌아오기를, 또한 그의 아들인 헌종과 철종 영가가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있는 것에서 왕실의 명복을 빌기 위한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불량시주록(1880년)>에서도 발견된다. 1880년 고종의 아들이었던 완화군 이선(1868~1880)이 죽자 왕실에서는 그의 영가천도를 위해 불량답을 시주하고 있다.

고종 대의 왕실 자손들은 후사가 없거나 장성하여 한 가정을 이룰 만큼 성장한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왕자 생산과 수명장수는 왕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화계사 대시주자 가운데 한 명인 효정왕후 홍씨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고, 헌종의 첫째부인 효헌황후 역시 후사없이 일찍 세상을 등졌다. 신정왕후 조씨의 경우에도 헌종이 1849년 15세로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을 양자로 삼았다. 고종의 비인 명성왕후 역시 4남1녀를 두었지만 차남인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당시 왕실의 상황 속에서 화계사의 관음전과 명부전 불사에 왕실 비빈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874년 순종의 탄생은 자수관음도의 제작으로 이어졌고, 이를 봉안하기 위한 관음전이 1876년에 중수되었으나 공간이 협소하였다. 화계사 명부전의 건립은 왕실에서 잇따라 일어나는 왕자와 공주의 단명으로 이들의 천도를 위한 천도재가 절실히 요구되었고 천도재를 지낼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명성왕후의 장남은 1871년 윤11월4일에 태어나서 4일 만인 11월8일에, 그 다음에 태어난 공주는 출생 7개월 만에, 1875년에 태어난 대군 역시 13일 만에, 1878년에 태어난 대군 또한 4개월 만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일찍 세상을 떠난 왕손들이 극락왕생 하기를 바라는 왕실 어른들의 염원으로 화계사의 명부전은 건립된 것이다. 

화계사 명부전 존상이 1877년 황해도 배천 강서사에서 화계사로 이안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왕실과의 관련에서 찾을 수 있다. 왕실의 내명부 여인들이 기원하는 바는 왕자의 탄생과 그들의 수명장수였기 때문에 왕자 탄생을 기념하는 불사와 단명으로 세상을 달리한 왕손들에 대한 천도가 화계사의 불사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계사 명부전 불사에는 흥선대원군 가를 비롯해 명성왕후 민비 가와 당시 세력가인 윤자덕과 윤자록 등의 시주가 있었던 사실을 통해 왕실과 당시 세도가들의 후원 역시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화계사 명부전의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조성에는 1649년 황해도 배천 강서사에서 수조각승 영철(靈哲)스님과 함께 인명스님, 상운스님, 운혜스님, 옥순스님, 학종스님, 천휘스님, 학헌스님, 의상스님, 의호스님, 옥징스님, 묘현스님 등 총 12명이 동참하였다. 수조각승 영철스님은 17세기 전반인 1623년부터 1639년까지 조각승 수연스님과 함께 경기 일대 및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인물로 예산 수덕사 삼세불상을 조성한 조각승 수연스님의 수제자였다. 그는 1619년 서천 봉서사의 아미타삼존상 조성에는 4위 조각승, 1623년 강화 전등사의 삼세불상과 1634년 익산 숭림사 지장보살상 조성에는 3위 조각승, 1639년 예산 수덕사 삼세불상 조성에는 2위 조각승으로 참여했다. 

지장보살이 우리 곁에 나타날 때는 수행자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지장경>의 내용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계사의 지장보살상은 젊은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넓은 이마와 돌출된 코 그리고 꽉 다문 입의 표현에서 조각승 영철스님의 작풍을 느낄 수 있다. 스승인 수연스님이 조성한 불상은 얼굴이 정사각형에 가깝고 코가 이마선에서 크게 돌출되지 않게 표현한 것과는 다른 점이다. 목은 짧고 두터우며 어깨는 넓어 건장한 느낌을 준다. 당당한 신체와 율동적인 옷주름 표현에서는 스승인 수연스님의 작풍을 계승했지만, 상하로 긴 얼굴과 입체적인 옷주름으로 영철스님은 화계사 지장삼존상에서 독자적인 새로운 양식의 보살상을 선보이고 있다.

[불교신문3347호/2017년11월22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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