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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금강경] <42> 제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①‘공덕’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추진력
  •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 승인 2017.11.0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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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은 스스로 지은 공덕도
받지도 탐착하지도 않으니 
갠지즈강 모래알 수와 같은
칠보를 보시한 공덕보다 커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그것으로 보시하고, 또 다른 보살이 모든 존재가 무아(無我)임을 알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이루면, 뒤의 보살이 얻는 공덕이 앞의 보살이 얻는 공덕보다 뛰어나니라. 수보리여, 모든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니라.”

제28분 전반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공덕과 깨달음을 비교했다. 복덕(福德)과 공덕(功德)이라는 용어는 약간 다르게 사용된다. 좋은 일을 해서 덕을 쌓는다는 입장에서는 비슷하게 사용되지만, 전개되는 방향에 따라서는 다르게 사용된다. 즉 복덕이 인과의 법을 따르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면, 공덕은 깨달음으로 상승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앞의 경우는 복이 다하면 힘든 삶으로 떨어진다는 뜻의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는 용어에서 잘 드러나 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양무제가 갖가지로 불교를 위한 정책을 편 자신의 행이 얼마만큼의 공덕이 되느냐는 질문하자, 달마대사께서 공덕이 없다(所無功德)고 답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양무제는 많은 사찰을 짓고, 출가한 스님들을 뒷바라지 했으며, 경전의 보급에도 심혈을 기울인 인물이다. 바로 이점을 들어 달마대사께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던 것이지만, 자랑스러워하는 무제를 본 달마대사는 그의 선행이 오히려 아만(我慢)과 아상(我相)을 키운 점을 보고는 ‘공덕이 없다’고 꾸짖은 것이다. 

양무제와 달마대사의 대화를 통해 오늘날 이 땅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들을 살펴보면 무언가 한참 잘못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계에서도 승속을 막론하고 승가나 승려에 대한 비난 비방하는 글들이 갖가지 매체를 통해 발표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물론 그럴만한 사건이나 상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율장에 의하면 그와 같은 경우에 당사자에게 직접 지적을 하거나 승가 자체의 방식으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문제해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수의 대중에게까지 비난 비방하는 방식으로 집안의 일을 알리는 것이 과연 어떤 공덕이 될까? 비난 비방하는 이들은 아마도 옳은 일을 한다거나 종단을 아낀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하겠지만, 그 행위가 공덕도 복덕도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악업(惡業)만 쌓게 되어 점차 미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질 것이다. 가령 승가(僧伽, 비구 비구니의 집단)의 구성원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승가의 방식으로 출가자들끼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율장의 가르침이 있다. 떠도는 낭설 등으로 함부로 비방하는 것은 상대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선지식의 경지에 있지 않다면 함부로 남을 지도하려 해서도 안 된다. 상대를 잘못 지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누군가를 비난 또는 비방하는 경우, 자신의 삶이 과연 타의 모범이 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며, 비난 비방의 행위가 자신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지도 잘 살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있다면 그는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비난 비방하는 사람 또한 비난 비방한 행위의 과보를 받게 됨을 알아야 한다.

공덕이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추진력과 같은 것이다. 본문에서는 우주를 가득 채운 칠보(七寶)로 보시하고 그 공덕으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보살을 먼저 예로 들었다. 그리고 모든 존재 즉 형상을 가진 것과 형상이 없는 감정과 관념 및 인식작용까지도 절대불변의 개체나 요소가 없음을 알아서 깨달음을 이룬 보살을 대비시켰다. 그리고는 깨달음을 이룬 보살이 훨씬 뛰어나다고 말씀하셨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깨달음으로 시작된 종교이다. 따라서 깨달음도 석가모니의 깨달음이 기준이다. 수많은 고승들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표현을 삼갔던 것도 부처님 앞에서의 겸손이었다. 그러니 알음알이의 차원에서 깨달음을 함부로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불교신문3344호/2017년11월11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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